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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3)화 (153/174)

153화

나는 플레온 사제와 데이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설마했는데 플레온 사제는 데이릭과 한패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플레온 사제도 지금은 악룡의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플레온 사제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것을 왜 이렇게 거부했는지 이해가 갔다. 어쩌면 그는 그런 말들로 데이릭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놀라울 정도로 타이밍 맞춰 등장한 데이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확신이 들었다.

“플레온 사제님…….”

플레온 사제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계속 내 옆에서, 그리고 신전에서 지내 왔던 것을 생각하면 실망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플레온 사제의 자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를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데이릭이 사용하는 악룡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플레온 사제가 언제부터 악룡의 힘에 지배받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그의 자의가 아닐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건 있었다.

“설마 라이넬 사제님이 악룡의 힘에 의해 지배당한 것에…… 플레온 사제님의 영향이 있나요?”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플레온 사제는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침묵을 유지하던 플레온 사제가 마침내 뱉어낸 말은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그때 위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온 사제에게서 시선을 들어 데이릭을 올려다보자, 데이릭이 재미있다는 듯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성녀님,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이제 다 들켜서 하는 말이지만, 성녀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플레온 사제님의 개입이 훨씬 더 많이 있었는걸요?”

데이릭은 플레온 사제가 끝끝내 말하지 못했던 내용을 언급했다.

“성녀님도 아시죠?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동물의 생명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전날 내가 그에게 확인을 구하며 물었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도움을 주신 분이 바로 플레온 사제님입니다.”

“뭐……?”

믿을 수 없는 말이 데이릭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플레온 사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데이릭을 도왔다는 말이 되었다.

확답을 구하듯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플레온 사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럼 그동안…… 아닌 척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거였나요, 플레온 사제님?”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럼 저는 플레온 사제님을 데리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릭이 바닥으로 가뿐히 뛰어내렸다. 느리게 착지하는 그의 주변으로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데이?”

데이릭이 착지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빠르게 도약해 나간 제프리가 데이릭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마력이 데이릭을 감싸듯 보호한 탓에 제프리의 검은 허공에 가로막힌 모양으로 멈추고 말았다.

“오, 상처가 벌써 깔끔하게 나았네. 보통 같았으면 상처에 좀먹히다가 그대로 썩어 버렸어야 했는데.”

제프리가 멀쩡히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데이릭이 아쉬움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때 제프리의 주변으로 마력이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다.

“제프리, 피해!”

즉시 제프리를 향하는 마력탄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제프리를 향해 외쳤다.

제프리 역시 마력을 감지했는지 황급히 몸을 틀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콰광!

마력탄이 제프리가 서 있던 자리를 직격하며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팼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정말 무식한 공격이구나, 데이.”

제프리가 허탈하게 웃으며 데이릭을 주시했다.

데이릭은 그런 제프리의 말에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더니 이내 팔짱을 꼈다.

“다른 걸 원해?”

데이릭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피어올랐다.

나는 그런 데이릭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몰라도 데이릭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아마도 나와 제프리를 적으로 둔 이 상황에서도 딱히 지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공격만 해 오는 듯했고.

데이릭의 공격을 신력으로 파훼시킬 수 있는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럴 수 없는 제프리는 데이릭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특히나 데이릭의 마력에 의해 부상을 입으면 치료조차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라이넬 사제님이 있으니 어떻게든 부상을 치료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와 대적하기도 곤란한 것이 현실이었다.

만일 그러다가 정통으로 맞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런데 데이릭이 이 공격에서 또 다른 변주를 주게 된다면 더더욱 그를 상대하기 까다로워질 것이었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제프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데이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와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너무 단조로웠던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아무래도 불공평하잖아. 안 그래? 성녀님과 너는 둘이고, 난 한 명이잖아? 게다가 성녀님도 제프리 너도 둘 다 검술의 귀재인데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런 기교밖에 없잖아. 이건 좀 억울한 것 같아.”

데이릭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글쎄, 하나도 억울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데이릭 네가 가진 힘이 얼마나 괴팍한지 알잖아?”

이미 데이릭 혼자서 우리 둘을 가뿐히 상대하고 있었다.

우리 쪽이 머릿수가 많다고는 하더라도 제프리의 경우에는 데이릭의 공격에 반격할 수 없었으므로 온전한 적수라고 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신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자연스럽게 시선이 플레온 사제에게 머물렀다. 이 자리에서 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당연히 나와 플레온 사제 둘뿐일 테니까.

하지만 플레온 사제를 우리의 적수로 내세울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다고 한들 별 소득은 없을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 정도일까?

확실히 오랜 시간 정들었던 플레온 사제를 방패로 내세우면 데이릭과 싸우기 더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구보다 빠르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플레온 사제는 신력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니까.

검을 다루는 기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나처럼 수호룡의 가호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다리에 부상을 입혀 방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나중에 일이 일단락되고 치료를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내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레온 사제는 침묵을 고수한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을 느낀다고? 플레온 사제가?

악룡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을 플레온 사제가 사적인 감정을 품었다는 것이 의아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그 순간만큼은 이성마저도 악에 물들어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기에 라이넬 사제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고.

‘비브르.’

나는 속으로 비브르를 불렀다. 평소와 다르게 곧장 대답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비브르가 듣고 있다고 짐작하며 의문스러운 부분에 대해 말했다.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자의 이성이 악에 물들지 않았을 확률이 있어?’

많은 사례를 접하지 못한 나보다는 비브르가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

그러나 어째서인지 비브르는 말이 없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분명 내 어깨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비브르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브르?’

내가 당황해서 비브르를 다시 부르자 그제야 비브르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그럴 확률은 없을 거란다.]

비브르의 답은 부정이었다.

곧이어 비브르는 왜 그런 결론을 도출했는지 첨언했다.

[이미 미라벨 너도 14년 전 사제 한 명이 악룡의 힘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그때 그 사제가 네게 수작을 부릴 때 괴로워하는 듯이 보였느냐?]

비브르가 나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14년 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으니까.

빠르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정확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 악룡의 힘에 지배되었던 사제는 나를 대하며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었던 것 같아.’

[그래.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동안에는 생각과 사고가 악에 물들고, 또한 지배하는 자의 의식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비브르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비브르는 플레온 사제와 함께 악룡의 봉인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테니까.

안타까웠지만, 어쨌든 이 상황에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플레온 사제의 반응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죄책감에 휩싸인 모습조차도 연기이거나, 아니면 그가 악룡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

‘차라리 저것도 전부 나를 괴롭히려는 데이릭의 계획이었으면 좋겠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싹을 틔운 불신은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래서 나도 한 명 더 있는 편이 좋겠지?”

그사이 데이릭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이 방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모습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베트람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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