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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51)화 (151/174)
  • 151화

    “그나저나 괜찮아, 너희들?”

    에이드리안이 문득 나와 제프리에게 물었다.

    “뭐가?”

    “왜?”

    동시에 에이드리안에게 묻자 그가 쓰게 웃었다.

    “아냐, 괜찮아 보이니 됐어.”

    싱겁게 대화를 끝낸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황태자 전하!”

    그때 멀리서 병사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에이드리안 근처에서 멈추어 선 병사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에이드리안에게 볼일을 이야기했다.

    “황성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벌써?”

    에이드리안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아직 11시도 되지 않았건만 에이드리안은 바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데이릭이 나타나도 에이드리안과 함께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응.”

    에이드리안은 아쉬움을 숨기지 않으며 몸을 돌려 신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라이넬 사제님을 만나 볼 거야.”

    “같이 가 줄게.”

    “굳이?”

    혼자 가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라이넬 사제님이 날 공격할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제프리는 완강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혼자 가나 제프리가 함께 가나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았기에 그의 제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럼.”

    내친 김에 바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프리와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라이넬 사제가 먼저 자리를 떴기에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그가 어디로 갔는지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허물어진 복도를 지나 보육원 근처에서 라이넬 사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넬 사제님.”

    내 부름에 라이넬 사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성녀님이시군요.”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로 라이넬 사제가 중얼거렸다.

    “잠시 대화 괜찮으세요?”

    “예, 얼마든지요.”

    라이넬 사제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성녀님 역시 제가 의심스러우시죠?”

    어렵게 꺼낸 라이넬 사제의 말이었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할 것 같아요. 실종되었던 그 일주일 사이의 일을 전 전혀 모르니까요.”

    “이해합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어요.”

    “말씀하십시오.”

    내가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라이넬 사제는 친절히 웃으며 대답했다.

    “다니엘에게 찾아간 건 기억 나시나요?”

    “다니엘…… 에게요?”

    “네.”

    라이넬 사제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나 라이넬 사제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다니엘 크라이튼을 찾아갔습니까?”

    “네.”

    라이넬 사제가 나직이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어떻게 되었죠? 혹시 데이릭 모어와 만난 것은……!”

    당황해서 묻는 라이넬 사제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다니엘은 죽었어요.”

    “……예?”

    라이넬 사제는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라이넬 사제를 확인하며 다시금 결과를 입에 올렸다.

    “저와 전투를 마치고 죽었어요.”

    “성녀님께서는 무사하셨습니까?”

    “네. 다행히도요.”

    내 대답을 들은 후에야 라이넬 사제가 길게 숨을 뱉어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라이넬 사제는 내 손을 잡고 상체를 숙여 자신의 이마에 내 손을 재었다.

    “여신님의 가호가 항상 성녀님께 깃들기를…….”

    짧게 읊조린 라이넬 사제가 몸을 들었다.

    “근데 혹시 기억이 끊기기 전은 어땠는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빙긋 웃어 보인 후 뒤늦게 라이넬 사제를 향해 물었다.

    라이넬 사제는 잠시 생각하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특별할 것 없었습니다. 데이릭 모어를 감시하기 위해 다른 사제님과 교대하고 데이릭의 앞에 선 이후로 기억이 없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소한 거라도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데이릭 모어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라이넬 사제가 작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그가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있었군요. 제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있긴 있었습니다만, 이건 데이릭 모어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이 일의 실마리가 될지.”

    내가 조르듯 그를 채근했다. 라이넬 사제는 당황한 듯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주변을 한번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제가 데이릭 모어의 감시를 위해 그를 찾았을 때, 감시를 맡는 사람이 바뀌었더군요.”

    “바뀌었다고요? 어떻게요?”

    “원래는 콜린 사제님이 제 앞 순번이었습니다만, 콜린 사제님이 아니라 플레온 사제님이 데이릭 모어를 감시하고 있더군요.”

    “플레온 사제님이요?”

    “예. 뭐, 아마 콜린 사제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순번을 바꾸지 않았을까 합니다.”

    “네에…….”

    순서를 바꾸는 것 자체만으로는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었기에 문제 삼을 것이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편히 쉬세요. 마음 번잡스러우실 텐데 괜히 이것저것 여쭤봐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성녀님의 질문이라면 언제든 답변해 드릴 수 있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라이넬 사제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라이넬 사제님에게서 데이릭의 힘을 끊어낸 거 맞지?”

    제프리가 떠나가는 라이넬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응. 널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거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보육원을 바라보았다. 데이릭이 자란 장소였다.

    14년간 지켜보며 그래도 데이릭이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또 많은 사람과 잘 어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내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데이릭은 여기서 잘 지내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모든 것이 연기였으니 내가 알아낼 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내 생각에는 다른 사제들도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왜?”

    제프리를 돌아보자 제프리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라이넬 사제님도 당했잖아. 그럼 가까이에 있던 다른 사제님들도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프리는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데이릭이고, 또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면, 한 사람한테만 그런 힘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거든. 라이넬 사제님에게 그 힘을 사용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시도해봤다거나.”

    “그렇겠지…….”

    제프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라이넬 사제는 듀아나 신전에서도 신력을 다루는 능력이 수준급이었다. 성녀인 나조차도 라이넬 사제를 따라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데이릭이 라이넬 사제에게 악룡의 힘을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자신을 감시할 사람을 붙이게 만든 것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는 그가 라이넬 사제를 필요로 한 것이 다니엘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실제로 다니엘의 부상이 나았던 것은 라이넬 사제의 힘일 테니까.

    그러나 제프리의 말대로 내가 그런 힘을 가졌다면 라이넬 사제 한 명에게만 그런 힘을 사용했을까?

    그 전에 능력을 확인해 볼 겸 누군가에게 그 힘을 먼저 사용해보지는 않았을까?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주제였다.

    “그럼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그래. 혹시 모르니까. 아니면 좋은 거고.”

    제프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고개를 들기 무거운 날인 듯했다.

    제프리의 제안처럼 확인해 봐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는 적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빠르게 확인해 보는 게 낫겠지.

    “그럼 일단……”

    고개를 들어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을 입에 올렸다.

    “플레온 사제님한테 가 보자.”

    말을 마치고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그래도 데이릭과 접촉한 사제들은 많지 않을 테니 확인이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 옆을 따라 걷던 제프리가 문득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굳이 플레온 사제님부터 하는 건 아까 라이넬 사제님의 말 때문이지?”

    “……응.”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라이넬 사제의 기억이 끊기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이 플레온 사제였다고 했으니 한 번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신전에서 나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라이넬 사제와 플레온 사제 두 명이었다. 신전 사람들 중에서도 두 사람이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또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 부디 플레온 사제도 악의 힘에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 맞다고 해도 내가 되돌릴 수 있으니까.”

    레피드와 내 힘이라면 만일 플레온 사제가 악룡의 힘에 의해 조종당한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 있었다.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제프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크고 투박한, 그러나 조금은 따뜻한 손이 어깨에 닿으니 왠지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제프리는 그런 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네 옆에 있을게.”

    다정하고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나는 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제프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주시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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