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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9)화 (149/174)
  • 149화

    새벽 늦게 도착했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밤을 뜬눈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릭의 힘은 확실히 강력했다. 그의 공격에 부상을 입으면 신력으로 치료하는 것도 어려웠다. 만일 라이넬 사제가 때를 맞추어 듀아나 신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제프리의 상처는 점점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뻔했겠지.

    이런 상태라면 데이릭을 상대하는 게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 주변을 둘러싼 마력탄이 문제였다.

    마력탄을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그 이후가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데이릭이 인정한 대로 데이릭은 나와 제프리와는 달리 체력 단련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손에만 잡힌다면, 당장이라도 데이릭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 마력탄을 어떻게 뚫어야 하는 건지…….

    우선 처음 세운 계획대로 레피드를 제프리에게 넘겨 내 엄호를 맡도록 하고, 내가 데이릭을 잡는 게 제일 나은 계획이기는 했다.

    그런데 만일 또다시 그 계획을 실행했다가 제프리가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게 옥죄어 왔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주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문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가씨, 씻을 시간입니다.”

    아니타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아니타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아니타와 함께 욕실로 향했다.

    가볍게 씻고 옷을 입은 후 곧장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어쩐지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와 숙부님은요? 그러고 보니 오빠도 없는데…….”

    엄마와 나만 식당에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를 향해 물었다.

    “다들 일이 있어서 일찍 자리를 비웠어. 미라벨, 넌 좀 괜찮니? 아버지와 함께 늦게 들어온 것 같던데.”

    엄마가 걱정을 담아 내게 물었다. 계속 쌓이고 있던 근심이 엄마의 걱정 어린 말에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도 알잖아. 난 성녀인걸. 신력으로 피로 정도는 얼마든지 지울 수 있어.”

    내 말에 엄마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거 다행이네. 그래도 벨, 몸조심하렴. 가뜩이나 신전이 반파된 일로 주변이 어수선한데 혹여라도 네가 다치면 엄마는 마음이 찢어지니까.”

    “알겠어. 더 조심할게.”

    “그래.”

    엄마는 내 대답을 듣고도 한참 동안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벨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는 짧게 말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엄마의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건 걱정이고, 불안이며, 또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나를 향한 많은 감정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

    “아냐, 괜찮아.”

    나 역시 짧게 대답한 후 식사하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는 처음 갖는 둘만의 식사였다.

    “오늘도 신전에 갈 거니?”

    식사를 거의 다 마쳤을 무렵 엄마가 내게 질문했다.

    “응. 가야지.”

    할 일이 있으니 가야만 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가 신전에서 대기하고 있는 쪽이 좋았다.

    나는 이 일로 인해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는 게 미안해서 괜히 흘긋거리며 엄마를 확인했다.

    엄마는 입가심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불안함은 좀 가신 듯했다.

    “조심히 다녀오렴.”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엄마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녀올게.”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가 나를 반겼다.

    “오늘도 신전으로 가십니까?”

    마부가 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 나에게 물었다.

    “응. 조심히 가 줘.”

    “예, 작은 아가씨.”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동하는 동안 눈을 감고 혹시나 데이릭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확인해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이릭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가 신전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성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사제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늦었나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나온 것이었는데 내가 제일 늦은 듯했다.

    사제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어 보인 후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제를 따라 신전 잔해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나마 멀쩡한 내부로 들어가니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오, 성녀님.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보아하니 제프리와 에이드리안도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 그리고 엘리엇 역시 이곳에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그리고 숙부님이랑 오빠, 황태자 전하까지……. 다들 이곳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크라이튼 대공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니다. 우리는 황성에서 먼저 황태자 전하를 뵌 후 이곳으로 온 것이란다.”

    “아, 그렇군요.”

    그제야 에이드리안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에이드리안 역시 황제 폐하의 명으로 데이릭을 추포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그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내가 혼자 수긍하며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자 에이드리안이 엷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그런 에이드리안을 향해 비로소 화답했다.

    “그럼 인사는 이쯤으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바론 대주교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바론 대주교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시선을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바론 대주교의 시선이 향한 곳은 라이넬 사제였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묻게 되었습니다. 라이넬 사제, 그간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바론 대주교의 질문에 라이넬 사제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외람되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마지막 기억은 데이릭 모어를 감시하던 것입니다.”

    라이넬 사제는 흔들리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바론 대주교는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인지 시선을 맞춘 채로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계속되는 침묵이 무겁다고 생각할 무렵, 바론 대주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데이릭 모어와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어떤 연유로 다시 듀아나 신전에 스스로 돌아오게 된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바론 대주교의 이번 말은 조금 냉랭했다. 라이넬 사제가 입술을 떼었다가 이내 꾹 닫았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제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뭐지요?”

    “제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느낀 건 아주 춥고 어두운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는 겁니다.”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라이넬 사제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깨어나고 나서도 현실에 대한 감각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제가 신전을 다시 찾은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닐지요? 어떻게든 그 추운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요.”

    라이넬 사제가 잠시 말을 끊었다. 긴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는 건 저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였다고 하더라도 신뢰하기 어려웠겠지요. 하지만 듀아나 여신님께 맹세컨대 지금의 저는 결백하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다시금 입을 연 것은 또다시 라이넬 사제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도 기억을 해 내야 데이릭 모어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텐데…….”

    “아닙니다. 그 정도면 되었습니다.”

    바론 대주교는 괴로워하는 라이넬 사제의 말을 끊었다.

    주름이 파인 미간이 바론 대주교의 근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의심해서 나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넬 사제가 돌아온 시기가 지나칠 정도로 시의적절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의심하게 된 점은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예, 이해합니다.”

    바론 대주교의 말에 라이넬 사제가 수긍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확실히 의아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넬 사제는 데이릭과 함께 일주일 넘게 실종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와 제프리가 데이릭과 대면하여 전투를 벌인 그날 새벽에 듀아나 신전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릭이 무언가 수를 쓴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전투를 벌인 그 언덕에 라이넬 사제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 의심스러웠다.

    데이릭은 라이넬 사제가 ‘잘 있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라이넬 사제가 듀아나 신전으로 오게 된 걸까?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라이넬 사제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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