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라이넬 사제는 제프리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수정 방의 효력으로 다행히 부상이 더 악화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 집중하여 제프리의 상처를 확인한 라이넬 사제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저 혼자는 무리일 듯싶습니다.”
라이넬 사제의 입에서 어렵게 나온 말에 나는 실망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라이넬 사제라면 제프리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치료가 안 되는 건가요?”
나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라이넬 사제를 향해 물었다. 라이넬 사제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외람되지만 성녀님의 힘을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다행히도 라이넬 사제에게서 들려온 것은 포기나 체념 어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단 가까이 와서 제프리 콜먼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네. 이렇게요?”
라이넬 사제의 말을 따라 제프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제가 제프리 콜먼을 둘러싼 악룡의 기운을 막을 테니 성녀님께서 그사이에 치료를 진행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내가 대답하자 곧 라이넬 사제가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며 제프리의 몸에 둘러지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곧 제프리의 몸에 난 상처를 감쌌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제프리의 상처에 닿자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라이넬 사제의 신호를 받으며 나 역시 제프리를 향해 신력을 사용했다.
처음 그가 다쳤을 때는 그의 몸에 신력이 하나도 흡수되지 않았건만, 라이넬 사제의 도움을 받으니 느린 속도로나마 신력이 제프리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신력을 이용하여 제프리의 부상을 천천히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치료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할 무렵이 되어서야 고개를 들어 라이넬 사제를 확인했다.
라이넬 사제가 악룡의 힘을 저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이마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치료는 어느 정도 마친 것 같아요.”
나는 아직까지도 집중하고 있는 라이넬 사제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눈을 감고 있던 라이넬 사제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치셨군요. 다행입니다.”
말을 마친 라이넬 사제가 천천히 힘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룡의 기운이 제프리의 몸에 닿아 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스러졌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라이넬 사제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다급히 그를 향해 물었다.
안 그대로 라이넬 사제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직접 치료한 게 나라고는 해도 그 역시 고난도의 능력을 사용하였으니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염려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라이넬 사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짧게 대답을 마친 라이넬 사제가 이내 제프리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라이넬 사제를 향한 걱정을 지우지 않고 제프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치료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건지 그의 몸에는 어떤 부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선은 제프리를 바르게 눕히고 그를 확인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마치 잠든 듯한 모습이었다.
“제프리.”
긴장한 마음으로 제프리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나와 대화하며 깨어 있던 제프리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영 불안하게 느껴졌다.
“제프리, 잠깐 눈 좀 떠 봐.”
다시금 제프리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제프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했다.
곧 제프리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 안에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제프리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허공을 훑어보다 나를 바라보았다.
“좀 어때? 아직도 아파?”
내가 그에게 묻자 제프리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에게서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게 퍽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제프리가 불안감에 휩싸인 나를 보며 엷게 미소를 지으며 내 불안을 종식시켰다.
“아니, 하나도 안 아파.”
말을 마친 제프리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그가 편히 일어날 수 있도록 그를 부축해 주었다.
“치료해 준 거야?”
제프리가 몸을 움직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넬 사제를 바라보았다.
“라이넬 사제님이 도와주셨어.”
그제야 제프리가 시선을 돌려 라이넬 사제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녀님의 부탁이신걸요. 게다가 듀아나 신전의 신자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저는 도움만 드린 것일 뿐, 실제로 치료를 해 주신 것은 성녀님이시기도 한걸요.”
라이넬 사제는 그 자신의 공을 내게 돌렸다.
실질적으로는 라이넬 사제가 아니었다면 제프리를 치료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아니에요. 라이넬 사제님 아니셨으면 치료는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정말 감사드려요.”
내가 직접 라이넬 사제를 향해 감사를 전했다.
라이넬 사제는 나를 보며 푸근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넬 사제님은 좀 괜찮으세요? 그러고 보니 회복하신 지 얼마 안 되셨는데 제가 무리하게 부탁을 드렸잖아요.”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성녀님께서 치료를 잘 마쳐 주신 덕분에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고요.”
라이넬 사제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그가 괜찮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제프리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몸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인 듯했다.
“어때?”
“멀쩡해. 오히려 몸이 평소보다 더 가벼운걸?”
“다행이다.”
제프리가 다시금 그의 상태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자 내내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모두들 밤이 늦었으니 휴식을 취한 후 아침에 다시 얘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플레온 사제가 제안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미라벨, 너도 오늘 너무 무리했잖니. 이제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크라이튼 대공마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내가 많이 걱정된 듯했다.
확실히 늦은 새벽까지 많은 일을 겪은 참이었다. 신력으로 피로를 날려 버릴 수 있다고는 해도 휴식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네,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수정 방은 제프리의 부상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휴식을 취하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전에 남은 방을 내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신전이 반파되지 않았다면 신전에 방을 얻었겠지만, 애석하게도 편하게 머무를 만한 방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신전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을 빼앗아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그럼 여관으로 돌아가 볼게.”
제프리가 자리에서 가뿐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겠어? 나랑 같이 우리 저택으로 가도 되는데.”
나를 감싸다가 다친 제프리였다. 기왕이면 우리 저택에서 지내며 편안한 숙식을 제공하고 싶었지만, 제프리는 고개를 저으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야. 들어 보니 어차피 내일도 다들 신전 앞으로 모일 거잖아. 그리고 내 동료들한테도 상황 정도는 인지시켜 놓아야 하니까.”
“알겠어.”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제프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과 함께 마차를 호출해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마차에 타고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힘들어 보이는구나.”
크라이튼 대공이 불현듯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자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크라이튼 대공에게 걱정을 끼친 것은 아닌가 해서 멋쩍게 웃었다.
“아니에요. 저보다 힘든 사람들이 더 많은걸요.”
나는 그중 한 사람이 크라이튼 대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몇 십 년간 함께 지냈던 동생이 14년 전 그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탈옥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도 꾸준히 다니엘을 찾아갔을 정도면 크라이튼 대공이 얼마나 다니엘의 타락을 깊이 슬퍼했을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크라이튼 대공은 내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다니엘과 대적한 상대가 바로 나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할아버지.”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크라이튼 대공을 불렀다.
“그래, 얘기하렴.”
빙긋이 미소를 짓는 크라이튼 대공을 보며 나 역시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힘내시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주제넘은 말일 듯했다.
대신 크라이튼 대공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신력을 사용하여 크라이튼 대공의 몸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그런 나를 보다가 함께 내 손을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