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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5)화 (145/174)
  • 145화

    신전은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었지만, 그래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들이 몇 있었다.

    그중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수정 방이었다.

    플레온 사제는 제프리를 수정 방 바닥에 눕힌 채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나는 그의 곁을 지키며 초조하게 발을 구를 뿐이었다.

    그때 내 어깨에 온기를 가득 머금은 손이 얹어졌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크라이튼 대공이 서 있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라벨, 괜찮을 거란다.”

    그러더니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걸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는 것보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뺨을 거칠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먼저였다.

    “정말 괜찮을까요, 할아버지?”

    제프리가 나를 구하다가 다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프리가 다쳤다는 사실 자체가 괴로운 걸까?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숨을 들이쉬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눈물을 보이자 품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었다. 그러고는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괜찮을 거란다. 플레온 사제라면.”

    “……네.”

    물론 플레온 사제 역시도 신력을 다루는 능력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그를 치료해 봤으나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다.

    실제로 플레온 사제 역시도 짐수레에서 선뜻 제프리를 치료하지 못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던 제프리의 체온이 생각나 나는 고개를 숙였다.

    플레온 사제는 바닥에 눕힌 제프리를 자세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플레온 사제의 질문에 나는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었다.

    “데이릭의 기운을 느끼고 그를 쫓았어요. 그리고 그를 만났는데, 제가 무리하게 데이릭을 붙잡으려다 제프리가 폭발에 휘말렸어요. 단순한 폭발이면 제 신력으로도 치료가 되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신력이 듣지 않아서…….”

    “폭발 자체에 악룡의 힘이 섞인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부상에 신력이 듣지 않는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플레온 사제가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이미 아까 들었던 말이라 더 놀라울 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내가 묻자 플레온 사제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일단 수정의 효과로 기운을 멈추기는 하겠지만, 치료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료가 되기는 하는 거예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확히 그에게 묻고 싶었다. 제프리의 부상이 치료 가능한 영역인지.

    플레온 사제는 잠시 뜸을 들이며 제프리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그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될 겁니다.”

    다행히도 플레온 사제는 내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나는 안도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더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악화를 막을 수 있나요?”

    내가 의아스러움에 묻자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수정은 아시다시피 신력을 봉인하는 힘을 갖고 있는 동시에 악룡의 힘도 어느 정도는 막는 힘을 가졌습니다.”

    나는 플레온 사제의 말을 들으며 수정을 다시 돌아보았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제프리 콜먼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조금씩 치료하는 것이 방법이 될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플레온 사제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기다렸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라이넬 사제님을 데려오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 될 듯하군요. 치료에 관해서는 라이넬 사제님의 실력을 웃도는 자가 없으니까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

    플레온 사제의 말대로 라이넬 사제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또 생겼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릭이 어디에 라이넬 사제를 숨겼는지를 먼저 찾아야만 했다.

    “미라벨!”

    제프리를 구할 수 있다는 안도 때문인지 긴장했던 것이 탁 풀어졌다. 그 탓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미라벨, 아가. 일단은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구나.”

    “네.”

    크라이튼 대공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서 쉬고 싶어요. 제프리 옆에서요.”

    “…….”

    저택으로 돌아가 나만 편한 곳에서 쉬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있을 거라면 수정 방에서 제프리와 함께 있고 싶었다.

    만약의 경우에 제프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근심 가득한 시선이었다.

    “저택에서 쉬는 것이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느냐?”

    크라이튼 대공이 나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 있고 싶어요.”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크라이튼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이곳에서 머물렴. 나 역시 미라벨 네 곁을 지켜 주마.”

    “할아버지께서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라벨 네가 내 시야에 있어야 나도 안심이 될 것 같구나.”

    “저는…….”

    내가 이곳에 있다고 해서 크라이튼 대공까지 불편하게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라이튼 대공을 말리려 했지만, 완강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내 말을 들은 후에야 크라이튼 대공이 플레온 사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되겠소, 플레온 사제?”

    “예, 그럼 이곳에서 머무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곳의 주인은 듀아나 신전의 사제들이었으니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플레온 사제는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허락을 내렸다.

    곧 플레온 사제가 평사제들에게 지시하여 우리가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수정 방은 신력을 봉인하는 능력을 가진 탓에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기력한 기분으로 제프리의 옆에 앉았다.

    크라이튼 대공 역시 멀지 않은 곳에서 나와 제프리를 주시하며 앉았다.

    평사제들이 나가고, 수정 방 안에는 제프리와 나, 그리고 플레온 사제와 크라이튼 대공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플레온 사제는 제프리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나 역시 제프리를 확인하느라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던 찰나의 일이었다.

    “아가.”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불렀다.

    나는 제프리에게 주었던 시선을 크라이튼 대공에게로 옮겼다.

    “부르셨어요?”

    침묵이 가득한 방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했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단다. 대답해 주겠느냐?”

    크라이튼 대공은 유난히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당최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 무엇을 물으려 하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할아버지. 말씀하세요.”

    내가 긍정을 표하자 크라이튼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 변화가 의아했다.

    혹시 나 때문인가 싶었지만, 내게 있었던 일은 모두 그에게 말한 후였다. 나에 대해 따로 물을 것은 없을 것이었다.

    그럼 다른 이야기라는 건데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의아하던 찰나에 크라이튼 대공이 입을 열었다.

    “불편한 이야기겠지만, 하나 묻고 싶단다. 혹시 다니엘과의 전투에 대해 내게 말해 주겠느냐?”

    “…….”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에게는 철천지원수였지만, 그래도 크라이튼 대공에게 다니엘은 가족이었다.

    아무리 미운 짓을 저지르고 생명을 위협했어도 완전히 다니엘을 미워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막상 크라이튼 대공의 질문을 들으니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황성 감옥이 부서진 것을 깨닫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작은할아버지께서 탈옥한 이후였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다니엘과 있었던 일들을 입에 올렸다.

    사실을 전달하되, 크라이튼 대공이 너무 괴로워할 만한 이야기들은 생략하거나 짧게 줄이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작은할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힘에 잠식되어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데이릭이 부여한 악룡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요.”

    우리와 결투를 벌인 것은 맞았지만, 다니엘의 직접적인 죽음은 그의 탓이었다.

    그가 다스리지 못한 악룡의 기운이 그를 잠식했고, 결국에는 그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랬구나.”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크라이튼 대공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그러더니 미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다니엘 때문에 미라벨 네가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 끔찍한 모습까지 보게 만들고. 이 할애비는 아무것도 몰랐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구나. 미안하단다.”

    크라이튼 대공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건넸다.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마치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인 듯 내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나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그를 만류하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크라이튼 대공이 감정을 모두 쏟아부었을 즈음, 그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꺼낸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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