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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4)화 (144/174)
  • 144화

    비브르의 말대로였다. 제프리의 검에 신력을 덧씌우는 것으로도 충분히 레피드의 대체제로 사용할 정도는 되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너, 그거…….”

    제프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검이 레피드처럼 마력탄을 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봤지?”

    내가 제프리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들고 있는 그 검에 비하면 약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들고 있는 동안은 이 검 역시 비슷한 힘을 낼 수 있을 거야.”

    “신기하네요. 성녀님의 검이 아니어도 그런 걸 쓸 수 있군요?”

    내 말에 반응한 건 제프리가 아니라 데이릭이었다. 데이릭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밝히며 나와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위기감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제프리, 날 엄호해 줘. 데이릭을 붙잡는 게 목표야.”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볼게.”

    제프리가 대답하며 레피드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신호할 것도 없이 동시에 데이릭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제프리는 나보다 먼저 앞장서며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마력탄을 베어 넘겼다.

    한 손 검인 레피드가 어색할 텐데도, 그는 빠르게 적응하며 마력탄을 베어냈다.

    마력탄이 레피드에 의해 갈라지며 스산한 기운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나 역시도 제프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마력탄을 베어 넘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데이릭은 제프리와 내가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뒤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건데…….”

    마침내 우리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데이릭이 난처해하며 중얼거렸다.

    공터의 가장자리에 다다른 데이릭이 뺨을 긁적이더니 이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우리 간단한 인사는 마쳤으니 오늘은 여기서 헤어질까요?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무슨 소릴!”

    데이릭이 사라질 것처럼 말하자 제프리가 빠르게 도약해나갔다.

    그때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흔적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미라벨!”

    제프리 역시 그걸 느꼈는지 달리던 것을 멈추고 나를 향해 외쳤다.

    순간적으로 확산된 마력이 응축되다가 이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력으로 몸을 감쌌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맨몸으로 충격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내게 쏟아지는 충격은 없었다. 다만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상황을 부정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앞으로 익숙한 푸른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괜찮아?”

    고통스러운지 눈을 간신히 뜨고 있으면서도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제프리 너…….”

    나는 떨리는 입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제프리가 안심한 듯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금세 내 위로 쓰러졌다.

    묵직한 그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데이릭은 벌써 사라진 후였다. 아마도 방금 폭발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끼였던 듯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프리가 크게 부상을 입었는데 그를 방치하고 데이릭과 겨뤘다가는 제프리의 상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황급히 제프리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등이 까맣게 타 있었다. 짙은 탄내에 그의 피 냄새가 섞여 들었다.

    아무래도 폭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통에 부상을 크게 입은 듯했다.

    나는 얼른 그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며 신력을 불어넣었다. 이상하게도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다려, 제프리. 내가 낫게 해 줄게.”

    “…….”

    제프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그의 숨이 붙어 있다는 증거가 되어 주었다.

    내 손에서 천천히 새어 나온 하얀빛이 제프리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신력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어 상처가 회복되었어야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력은 그의 몸 위에 머무를 뿐, 그에게 흡수되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혼란에 휩싸여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금 손에 신력을 집중시켰지만, 피부의 자잘한 상처만 회복될 뿐, 타오른 흔적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신전으로 옮기자꾸나. 아무리 신전이 무너졌다 하여도 효험이 있을 거란다.]

    비브르가 내게 조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치고 제프리를 부축해 들었다.

    다행히 오래도록 수련을 해 온 덕분에 제프리 한 명을 둘러업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황급히 주변에 마구간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내가 그를 둘러업고 신전까지 가는 것보다 마차를 빌려 타고 가는 것이 빠를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제프리에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마침내 도착한 마구간에서 영업용 짐수레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듀아나 신전으로 가 줘. 최대한 빨리.”

    나는 품에서 금화를 꺼내어 수레꾼에게 건네주었다. 수레꾼은 내가 건넨 금화를 받아 들고 바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사이 나 역시 제프리를 짐수레에 조심스럽게 눕혀 주었다.

    짐수레는 천천히 듀아나 신전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피가 짚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후로도 신력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나 좀처럼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라이넬 사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신력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성녀인 나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라이넬 사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라면 분명 제프리의 부상을 치료하는 법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은 무의미했다. 라이넬 사제가 신전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프리의 부상을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더욱 악화되지는 않도록 신력을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짐수레가 덜컹거리자 제프리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곧 그는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눈동자가 지금만큼은 흐릿했다.

    그는 곧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곳이 짐수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이 입을 열었다.

    “……옛날 생각나네.”

    초조하게 그를 지켜보고 있는 찰나에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왜,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짐수레 안이었잖아. 기억나?”

    “말하지 마. 일단 체력을 비축해 놔. 곧 듀아나 신전으로 갈 테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제프리는 그 말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짐수레에서 널 봤을 때 좀 놀랐어.”

    “얘기하지 말라니까?”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거든.”

    내가 말에도 제프리는 끝까지 말을 마치고 피식 웃었다.

    나는 그런 제프리가 야속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하지 마. 그 이상 할 거면 나중에 해.”

    “……그래.”

    대답을 마친 제프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를 느끼는 건지 제프리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무어라 말을 더 꺼내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의 부상이 더 심해지지 않도록 신력을 주입하는 것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달리던 짐수레가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 정도 정리된 신전 터가 보였다.

    신전은 이미 부서진 건물을 다시 세우는 일이 한창이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

    다시 금화 하나를 꺼내 짐수레꾼에게 건네었다. 짐수레꾼은 공손히 금화를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제프리를 수레에 놔둔 채로 불러올 만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 나섰다.

    “미라벨이 아니냐?”

    “아니, 성녀님 아니십니까?”

    안에서 나온 것은 크라이튼 대공과 플레온 사제였다.

    나는 다급히 플레온 사제에게 다가갔다.

    “플레온 사제님, 저 좀 도와주세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다짜고짜 도움을 청하자 플레온 사제가 의아한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제프리가 많이 다쳤어요. 근데 제 신력으로 그를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제프리 콜먼이요? 그가 다쳤다니……. 그 정도의 실력자가…….”

    플레온 사제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중얼거리다가 이내 무언가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주십시오. 따라가겠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나는 플레온 사제를 대동한 채 신전 앞에 있는 짐수레를 찾았다. 짐수레에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제프리가 있었다.

    “맙소사.”

    플레온 사제는 제프리를 확인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보통 상처가 아니군요. ……데이릭 모어의 짓입니까?”

    곧바로 데이릭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플레온 사제가 짐수레 위에 오르며 물었다.

    “네, 맞아요. 조금 전에 그를 맞닥뜨렸는데, 저를 지키다가…….”

    나는 차마 말끝을 이을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제프리가 크게 다쳤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무모하게 데이릭을 잡으려 하지 않았더라면, 후일을 도모하며 그를 보냈더라면 제프리가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깊은 후회가 나를 잠식했다.

    “부상이 심각하군요. 마력이 신력의 흡수를 막고 있습니다. 일단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을 불러와 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나는 다급히 주변에 있던 사제들을 불렀다. 그들은 각자의 일이 있음에도 내 부탁에 흔쾌히 응하며 제프리를 무너진 신전의 안쪽으로 데려갔다.

    나 역시 그들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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