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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2)화 (142/174)
  • 142화

    [이 기운…….]

    나 말고 비브르 역시 기운을 감지했는지 내 어깨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데이릭이야.”

    “뭐?”

    내 소리가 들렸는지 제프리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제프리를 확인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데이릭의 기운이 느껴졌어.”

    짧게 말한 후 곧장 대회의장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기운이 느껴진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작은 아가씨, 어디 가세요?!”

    회의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타가 빠르게 달려가는 나를 불렀다. 아니타 역시도 나를 따라오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지만, 어려서부터 꾸준히 체력 훈련을 해 온 나를 아니타가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니타는 나를 쫓아오지 못하고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그런 아니타를 배려해서 자리에서 멈추었을 테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최대한 빨리 따라잡는 게 좋겠구나. 이대로 데이릭을 놓쳤다가 사건이 더욱 커질지도 모르니.]

    ‘나도 알아.’

    나는 속으로 대충 비브르에게 대꾸한 후 더욱 빠르게 도약해 나가기 시작했다.

    데이릭의 기운은 꽤 멀리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리가 머니 짧니 따지고 있을 새는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 만에 느껴진 기운이었다. 만일 지금 놓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데이릭을 찾아내지 않으면 곤란할 터였다.

    “같이 가, 미라벨!”

    감각에 의지해서 달려가고 있으니 뒤에서 제프리가 나와 속도를 맞추어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데이릭이야?”

    제프리가 확인차 내게 물었다.

    “응. 확실해.”

    제프리의 질문에 대답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비브르마저 알아차릴 정도이니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지만 조심하렴, 미라벨. 아무래도 데이릭의 형질이 더욱 사나워진 듯하구나.]

    비브르가 내게 경고했다. 비브르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나 역시 데이릭의 기운을 감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이릭의 기운은 이전에 내가 느꼈던 그 이질적인 기운과도 조금 다른 듯했다.

    거기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데이릭이 이런 기운을 숨기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나는 내가 데이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성을 벗어나고, 수도 외곽에 위치한 공터까지 달려 나간 끝에 우리는 데이릭과 마주할 수 있었다.

    데이릭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풀잎을 뜯고 있었다.

    나는 그런 데이릭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데이릭?”

    내게 데이릭을 부르자 데이릭이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푼수처럼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성녀님! 이제 오셨어요? 한참 기다렸는데 이제 오시면 어떡해요?”

    그의 말투도 내가 아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적어도 데이릭의 눈이 금색으로 바뀌어 있을 줄 알았다.

    데이릭이 악룡의 힘을 사용할 때면 그의 눈이 금색으로 바뀌며 기억을 잃는다.

    그러니 내가 아는 데이릭이라면, 악룡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벌인 일일 것이라고 애써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를 찾게 된다면 눈동자가 금색이길 바랐다.

    하지만 데이릭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공터에는 데이릭만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플레온 사제로부터 데이릭이 라이넬 사제와 함께 갔다는 정보를 접한 후인데, 어째서 데이릭 혼자인지 의아했다.

    “……라이넬 사제님은 어디 있어?”

    일단은 라이넬 사제님의 행방을 확인하고 싶었다.

    데이릭이 본인의 의지로 그런 거라면 라이넬 사제님은 데이릭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조력하는 상황일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라이넬 사제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라이넬 사제가 보이지 않으니 도움을 줄 수도 없게 되었다.

    “아, 뭐예요. 전 또 성녀님께서 저를 찾아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라이넬 사제님을 찾으러 오신 거였어요? 그건 좀 실망이네요.”

    데이릭은 퍽 실망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흙 묻은 엉덩이를 털었다.

    “뭐,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라이넬 사제님은 안전한 장소에 잘 계시니까요. 아무렴 고급 인력인걸요?”

    데이릭은 특유의 툴툴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런 데이릭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데이릭, 정말 실종 사건도 네 짓이 맞아?”

    그동안은 자신이 범인으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퍽 억울한 입장을 고수하던 데이릭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이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그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맞아요. 아, 좀 더 늦게 들켰으면 더 많이 즐길 수 있었는데……. 그건 좀 아쉽네요. 그래도 뭐, 그보다 더한 걸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손해 보는 일은 아니겠죠.”

    마치 장난을 치듯이 가벼운 말투로 대하는 데이릭의 모습에 왠지 화가 났다.

    “데이릭,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정말 네가 범인이야? 그럼 왜 그동안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동물을 찾아다녔던 거야?”

    내 기억에는 아직도 고양이 톰과 강아지 카린을 찾기 위해 나무를 타고 산을 휘젓던 데이릭의 모습이 선했다.

    데이릭은 내 말에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대꾸했다.

    “그거야 다 보여 주기죠. 성녀님은 생각보다 순진하시군요. 그렇게 행동해야 제가 무고하다고 믿을 거잖아요. 안 그래요? 실제로 성녀님은 반쯤 믿었으니 꽤 성공적이었네요.”

    “보여 주기라고? 그게?”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자 데이릭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이네요?”

    “……그래.”

    나는 데이릭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제일 궁금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데이릭이 왜 그랬던 건지.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데이릭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다가올 수가 없었다. 내 근처에 있던 제프리가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말해, 데이. 다가오지 말고.”

    제프리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데이릭을 향해 경고했다.

    데이릭은 제프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잘못되었던 거예요. 악룡의 씨앗인 내가 순수한 듀아나 여신의 신전에 몸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데이릭은 잠시 호흡을 고른 후 나를 보았다. 그순간, 보라색이던 그의 눈이 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저도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래, 학대받는 것보다야 낫겠지. 모르는 사람에게 고문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뭐, 그런 생각으로. 거북하고 메스꺼운 건 잠깐이니까.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던 거예요.”

    데이릭이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자 제프리가 검날을 세워 그를 겨누었다. 나도 언제든 레피드를 소환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 놓았다.

    “듀아나 신전에 있을 때면 매일, 매일 목이 말랐어요. 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늘 절 괴롭게 했죠. 그러다 문득 쥐 한 마리를 보았어요. 그때 뭔가에 홀린 것처럼 힘을 써서 쥐의 생명력을 모조리 흡수했죠. 그때 느꼈던 황홀감을 아마 성녀님께서는 이해 못 하실 거예요.”

    데이릭은 생각만으로도 황홀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거북한 그의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쥐부터 시작했니? 쥐가 없으니 고양이, 강아지, 마지막에는 사람까지?”

    내가 설마 하며 질문하자 데이릭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야, 역시 성녀님은 저에 대해서 잘 안다니까요? 하나만 말해도 열을 아는군요.”

    지금의 데이릭은 정말 이질적이었다. 마치 껍데기만 같은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꼬리가 기니 밟히게 되는가 봐요. 이렇게 들켜 버렸으니. 그래도 소득은 있었죠. 내가 가진 악의 힘이 조금씩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니까.”

    데이릭은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데이릭은 내가 알던 데이릭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알던 데이릭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내가 천천히 손을 말아 쥐자 곧 내 손으로 레피드가 소환되었다. 나는 레피드를 고쳐 잡은 후 천천히 신력을 불어넣었다.

    “뭐야, 저랑 싸우시려고요?”

    내가 레피드에 신력을 불어넣자 데이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에이, 전 성녀님이랑 별로 싸우고 싶지 않은데요? 저처럼 연약한 일개 신전 직원하고, 매일 검술 훈련하는 성녀님하고 싸움이 되겠어요?”

    데이릭이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홱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내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나도, 제프리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평평하던 바닥이 무참히 파헤쳐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방금 건 실수예요. 죄송해요. 칼을 보니까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나는 제프리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데이릭을 확인했다.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악의 기운이 스멀스멀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다니엘처럼 허접한 수준이 아니었다. 속도도, 폭발력도 모두 월등하리만큼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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