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1)화 (141/174)
  • 141화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은 정무 회의로 인해 아침 일찍 저택을 나간 것으로 아는데 이번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계속 황성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먼저 황제 폐하를 향해 예법을 갖추어 인사했다.

    황제 폐하는 흐뭇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롭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그래도 네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 같아 불렀단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여기에 참석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나는 대답을 마치고 시녀가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았다.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에이드리안과 제프리, 그리고 플레온 사제도 각각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제 얼추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해도 될 것 같군.”

    황제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황성 감옥에 대한 이야기일세.”

    황제가 운을 떼자 크라이튼 대공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브라이언이 크라이튼 대공을 흘긋 확인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다니엘 크라이튼으로 인해 황성 감옥이 폐허가 되었더군. 그리고 스스로 자멸하였다는데 맞는가?”

    황제의 질문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나와 제프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마쳤다.

    “듀아나 신전은 데이릭 모어라는 청년에 의해 그렇게 되었고.”

    “예,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의 중심은 역시 데이릭 모어라는 거군. 맞나?”

    “네, 폐하.”

    황제는 확답을 들은 후에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듣자 하니 다니엘 크라이튼이 벌인 일의 배후에도 데이릭 모어가 있다고 하던데?”

    황제의 시선이 회의장에 모인 이들을 향했다. 이를 지켜보던 플레온 사제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하게.”

    황제가 허락을 내리자 플레온 사제가 호흡을 고른 후 얘기를 시작했다.

    “먼저 말씀하신 것처럼 데이릭 모어가 다니엘 크라이튼과 접촉한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간수들 역시 암시에 걸려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였으나, 인근에서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데이릭 모어가 사건 하루 전에 황성 감옥을 찾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

    플레온 사제의 말을 듣던 황제가 끼어들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플레온 사제는 황제의 의문에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그런 플레온 사제를 빤히 주시했다.

    “아무리 데이릭 모어라는 청년이 악의 힘을 쓴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지. 분명 14년 전, 다니엘 크라이튼의 처분을 내리며 그가 탈출할 수 없도록 팔다리의 인대를 끊어 놓은 줄로 안다만. 혹 악의 힘에는 치유의 능력도 있는 것인가?”

    황제가 꺼낸 질문은 합당했다. 플레온 사제가 보고하며 일부러 꺼내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플레온 사제를 확인했다. 플레온 사제 역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쓰게 웃었다.

    “아닙니다. 악의 힘에는 치유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다니엘 크라이튼이 감옥을 탈출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건…… 데이릭 모어에게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력자?”

    황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예. 우리 듀아나 신전의 대사제였던 라이넬 사제가 데이릭 모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플레온 사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건 저의 추측입니다만, 이 사달이 나기 전,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 동물과 부랑자가 사라지는 기이한 사건이었죠.”

    “그건 나도 아네.”

    황제가 에이드리안을 한번 확인했다. 에이드리안이 요 며칠 정무 회의 때 언급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범인으로 모두의 의심을 받는 자가 데이릭 모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수를 증명하겠다며 듀아나 신전의 대사제들에게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제안을 해 왔죠. 그를 여전히 보호하고는 있었지만, 악룡의 씨앗이니 위험하다 판단했던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플레온 사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데이릭을 의심했던 나로 인해 생긴 해프닝이었다.

    “아마 데이릭 모어는 그걸 노렸던 것 같습니다. 높은 치유력을 가진 대사제에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요.”

    플레온 사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호흡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난 데이릭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용당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고, 순수를 증명하겠다며 대사제와 가까이 접촉하는 것.

    신전의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말단 직원이 된 데이릭으로서는 대사제와 직접 만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날 이용한 걸까?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데이릭 모어는 악의 힘으로 라이넬 사제를 지배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아시는 것처럼 다니엘에게 접근하여 성녀님께서 자리를 비울 미끼를 만들고, 그 틈에 신전을 파괴한 뒤 라이넬 사제와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플레온 사제는 말을 마치고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왜 굳이 그래야 했지? 크라이튼 소공녀가 신전에 상주하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미끼까지 만들어야 했을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 역시 데이릭 모어에게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명합니다.”

    황제의 질문에 바론 대주교가 대답했다.

    나 역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문이었다.

    데이릭은 왜 다니엘을 미끼로 나를 신전에서 떨어트려 놓으려 한 걸까?

    최근 들어 신전을 자주 찾기는 했지만, 보편적으로 내가 신전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신전에 없는 사이에 일을 쳐도 되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고민해 봐야 답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답은 데이릭과 직접 만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로는 실종 사건과 데이릭 모어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 부분에서는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제프리가 황제에게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그동안 제프리가 조사한 결과 동물들이 실종되는 것이 가시화된 건 5년 전의 일이었으며, 쥐 같은 흔한 소동물로 시작하여 이제는 사람까지 실종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목격한 것처럼 실종된 존재들이 가루가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이 모든 내용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탁자에 몸을 기대며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이 시간 부로 데이릭 모어에 대한 수배를 내리도록 하지. 우선은 크라이튼 공작, 그대가 황실 기사단장으로서 듀아나 신전과 협력하여 데이릭 모어를 제거하도록 하게. 이 일에는 에이드리안에게도 통솔 권한을 부여할 테니 잘 지도하도록 하고.”

    황제가 에이드리안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예, 폐하.”

    브라이언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제거가 우선일세. 굳이살려 두어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냉정하게 말하는 황제를 바라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판단이 맞는 걸지도 몰랐다.

    애초에 어린 데이릭을 데려와 보호하고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나와 신전이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 14년 전에 모든 걸 처리해 버렸더라면 동물은 물론이고 부랑자들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간 정들었던 데이릭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회의를 마치고도 나는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가, 브라이언과 난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 보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렴.”

    크라이튼 대공은 허망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자리를 떴다. 브라이언과 에이드리안도 함께였다.

    플레온 사제와 바론 대주교 역시도 신전의 재건을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남은 것은 나와 제프리뿐이었다.

    제프리는 탁자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뒤늦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시선을 받았다.

    “왜?”

    “아니, 그냥. 괜찮은가 해서.”

    제프리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나야 용병 한다고 자주 못 찾았지만, 미라벨 넌 데이릭과는 자주 만나고 꽤 친했잖아.”

    제프리의 말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데이릭과 친했냐고 물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제 와서는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알던 데이릭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이용해서 했던 것들, 그리고 나를 속였던 것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거짓이었던 것 같았다.

    “글쎄. 조금 기분이 이상하긴 하네.”

    내가 어색하게 웃자 제프리가 푸른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색이었건만, 이상하게도 제프리의 눈은 매번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제프리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의식적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제프리는 내 말을 쉬이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참 나를 응시하던 제프리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으면 언제든 말해.”

    제프리는 그렇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시선을 들어 제프리를 올려다보다가 그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뒷덜미 솜털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느껴져 헛숨을 들이쉬었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데이릭의 기운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