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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40)화 (140/174)
  • 140화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이 사건의 중심이 데이릭이라면, 이번에는 다니엘의 상처를 회복한 인물에 대해 알아보아야 했다.

    신력을 사용할 줄 아는 배신자.

    그러나 선뜻 플레온 사제에게 질문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만 했다.

    “플레온 사제님, 그럼 하나만 더 여쭈어 볼게요.”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다시 입을 열자 플레온 사제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 시야로 플레온의 지친 눈동자가 들어왔다.

    아마도 나만큼이나 플레온 사제도 힘들 터였다.

    게다가 그는 하반신이 돌무더기에 깔리는 부상을 입지 않았던가.

    “혹시…… 데이릭의 곁에 라이넬 사제님도 계셨나요?”

    데이릭이 듀아나 신전을 공격한 당사자인지 묻는 것보다도 라이넬 사제님을 배신자로 의심하는 것이 내게는 더욱 힘겹고 무거운 일이었다.

    조금 전 멀쩡히 걸어 다녔던 다니엘을 본 이후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부상을 그렇게 완벽하게 치료할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가 아는 한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한 명은 성녀라 불리는 나였다.

    내가 가진 막대한 양의 신력이라면 14년 전의 상처라고 하더라도 단숨에 치료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신력을 가장 섬세하게 다룰 줄 알며, 나에게 신력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내 스승이나 다름없는 존재.

    바로 라이넬 사제였다.

    다니엘을 회복시킨 것이 내가 아니었으니 라이넬 사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부디 플레온 사제가 내 질문에 허탈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해 주길…….

    그러나 애석하게도 플레온 사제는 가만히 나를 주시하다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상하신 것처럼 라이넬 사제님이 데이릭 모어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다행히도 제프리가 나를 부축해 주어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었으나 플레온 사제의 말을 부정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명백했다.

    나조차도 플레온 사제에게 확인을 하기 전부터 그를 의심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가슴 속에서 북받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라이넬 사제가 듀아나 신전의 배신자인 것이었다.

    “혹시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나요?”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으로 플레온 사제에게 물었다.

    그러나 플레온 사제는 이번만큼은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건물 잔해에 깔리고 난 이후로 정신을 잃어서…….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이군요.”

    플레온 사제는 내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을 정말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플레온 사제님께서 죄송해할 일은 아니죠. 저도 이제 막 도착한 거니까요. 일단은 좀 쉬고 계세요.”

    “……예.”

    나는 플레온 사제를 뒤로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데이릭과 라이넬 사제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 수소문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 가리키는 방향이 전부 달랐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플레온 사제는 어렵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성녀님.”

    “네, 사제님.”

    플레온 사제가 불현듯 나를 불렀다. 참담한 마음을 숨기고 플레온 사제를 향해 다가가자 플레온 사제가 속 깊은 시선으로 나를 주시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이넬 사제님도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플레온 사제는 라이넬 사제를 두둔했다.

    직접 두 눈으로 데이릭의 곁에 라이넬 사제가 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변함이 없는 태도였다.

    내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플레온 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님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악룡의 힘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요.”

    “아.”

    나는 뒤늦게 플레온 사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악룡의 힘으로는 다른 사람을 세뇌해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 거겠죠?”

    알고 있음에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예, 분명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 힘에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면 그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녀님밖에 없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시선으로 나를 살폈다.

    “그러니 라이넬 사제를 만난다면 그를 악의 힘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뒤이어 플레온 사제가 내게 말했다.

    “네, 꼭 그럴게요.”

    * * *

    [악룡의 힘이 아무래도 변이를 일으킨 것 같구나.]

    데이릭이 신전을 급습하고 난 이후로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데이릭의 흔적을 찾기는커녕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도 그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황실과 신전이 힘을 합쳐 데이릭을 수배하고 또 수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수사망에 데이릭이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데이릭이 수사망에 걸리는 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리가 되더라도 신력을 공기 중에 풀어 내 스스로 데이릭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수도에 있다면 내가 수색하는 범위 안에 반드시 들어오게 될 터였다.

    데이릭이 범인이라는 것을 모를 때와 알고 있는 지금은 천지 차이였다.

    나는 이미 데이릭의 기운을 알고 있었다.

    데이릭 역시 자신의 힘을 갈무리하는 법을 알고 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고난 기운마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꾸준히 수색하다 보면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변이를 일으켰어도 상관없어. 이미 데이릭의 힘이 어떻게 변이를 일으켰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는걸.”

    일전에 기운을 풀었을 때 내 신력을 알아차리고 깨트린 것은 역시 데이릭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아니고서야 공기 중에 섞인 희미한 신력의 그물을 알아차릴 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오늘도 최대한 집중해서 신력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좀 더 세밀하고 촘촘하게 망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범위는 아무래도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나는 신력을 회수하고 곧장 몸을 세워 문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가씨, 듀아나 신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니타의 목소리였다. 신전에서 나를 직접 찾아온 이유는 굳이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갈게.”

    나는 아니타에게 대답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침실 밖으로 나왔다.

    “아니타, 안내해 줄래?”

    “예, 작은 아가씨.”

    아니타가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1층 로비였다.

    계단을 내려와 로비로 들어서자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플레온 사제와 듀아나 신전의 평사제들이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짧게 인사를 마친 후 나는 곧 플레온 사제에게 다가갔다. 플레온 사제는 나를 확인하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 황실과 있을 회의에 모셔가고자 왔습니다.”

    “네. 알겠어요. 그럼 바로 가요.”

    어쨌든 나도 듀아나 신전의 주요 인사였고, 소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므로 회의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나는 플레온 사제와 함께 정문 앞으로 나왔다.

    이미 황실에서 내준 마차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 올라탄 후 천천히 마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는 어디서도 데이릭이나 라이넬 사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큰 사건을 일으킨 이후라 몸을 사리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14년간 알아 왔던 데이릭의 속을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마차는 황실에 도착한 후 멈추었다.

    나는 마차가 완전히 멈추어 선 후 천천히 내려섰다.

    “미라벨.”

    정문 앞에는 에이드리안과 제프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 당일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제프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에이드리안은 다른 사람을 통해 모든 얘기를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좀 어때?”

    많은 의미가 응축된 듯한 물음이었다.

    나는 내게 물어본 에이드리안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그래.”

    에이드리안은 나를 바라보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에이드리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고 천천히 황성 안으로 들어섰다. 제프리는 그런 우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제프리도 같이 회의하는 거야?”

    사건의 당사자이기는 했지만, 용병인 제프리가 회의에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질문을 꺼냈다.

    “응. 일단 제프리도 경비대의 의뢰로 실종사건을 수색 중이기도 했고, 이 모든 게 하나의 사건이라면 제프리야말로 중요한 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

    나는 수긍하며 제프리를 돌아보았다. 제프리는 내 시선에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릴 뿐이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드디어 에이드리안이 안내해 준 장소는 황성의 대회의장이었다.

    넓은 회의장에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와 크라이튼 대공, 브라이언, 그리고 듀아나 신전의 대주교 바론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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