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괜찮아?”
제프리가 문득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프리를 돌아보았다. 제프리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으응, 괜찮아.”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으나 이내 웃음이 금세 무너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니엘이라면 내가 오래전부터 죽이고 싶어 했던 적이었다.
다니엘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었고,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그중에는 가족도 있었고, 희망도 있었고, ‘나’도 있었다.
과거로 회귀한 이후로 그를 죽이는 게 내 목표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다니엘이 사특한 기운에 잠식되어 가루가 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미묘하게 떨려 왔다.
그때 내 어깨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제프리의 손이었다.
제프리는 내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이제는 완전히 기화되어 사라진 다니엘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자 나를 위로하려는 속셈으로 손을 얹은 듯했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어깨 위에 올라온 제프리의 손을 잡았다.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제프리에게서 큰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뒤늦게 내가 여기서 밍기적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신전으로 돌아가자.”
“벌써? 여긴 어쩌고?”
내가 상황 수습은 뒤로한 채 신전으로 가려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제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난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제프리도 이곳까지 따라와 상황을 같이 겪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그가 모르는 것이 많았다.
확실히 신전으로 돌아간다면 이곳의 상황이 정리된 이후가 되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신전으로 가 봐야 해. 신전에 있는 누군가가 이 일에 개입한 거 같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에게 힘을 준 사람과 다니엘을 치료한 사람.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걸 확인해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무엇보다 정말 그 사람들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걸 저지하는 것도 내 일이 될 터였다.
“알겠어. 그럼 같이 가.”
“응.”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제프리가 복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흔쾌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타고 왔던 말을 향해 다가갔다. 다행히 말은 그런 혼란의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가벼운 도약으로 말 위에 올라간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말 위에 올라탄 제프리를 확인했다.
“가자.”
“그래.”
제프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장 말을 달려 신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달리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디 별일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말을 더욱 재촉했다.
* * *
“이게 무슨…….”
제프리와 함께 듀아나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황성 감옥과 마찬가지로 폐허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 버린 듀아나 신전이었다.
비록 한 번의 습격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의 습격으로 신전이 이만큼 무너질 리는 없었다.
분명 가장 처음 습격에서는 외부 건물이 파괴되긴 했지만, 내부에 크게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듀아나 신전은 그 잔해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제프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쪽에도 습격이 있었던 듯했다.
나는 말에서 뛰어내려 부서진 신전 안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혹시나 잔해에 깔리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내 예상대로 아직 구출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제프리가 그런 사람들을 끄집어내면 내가 빠르게 신력으로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그렇게 신전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할 때였다.
익숙한 사제복의 노인이 잔해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플레온 사제님!”
나는 다급히 플레온 사제로 추측되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제프리, 그것 좀 치워 줄래?”
“알겠어.”
제프리는 검을 지렛대 삼아 플레온 사제의 하반신을 누르고 있는 거대한 돌조각을 치워 냈다.
“으윽…….”
돌조각이 사라지자 플레온 사제가 정신을 차렸는지 작게 신음했다.
나는 다급히 플레온 사제를 향해 손을 뻗어 신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내 손에 하얀빛이 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플레온 사제에게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괴로움으로 신음하던 플레온 사제는 신력이 완전히 흡수될 때쯤이 되어서야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한 채로 눈을 떴다.
“괜찮으세요?”
나는 플레온 사제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플레온 사제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인지 나와 주변을 몇 번이나 둘러보았다. 그런 후에야 나직이 탄식했다.
“맙소사. 꿈이 아니었군요.”
플레온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괴로움을 견디기 힘든 듯했다.
“플레온 사제님. 저예요. 미라벨이요. 알아보시겠어요?”
내가 묻자 플레온 사제가 두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내 강직한 모습만 보여 주었던 플레온 사제의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았다.
“여신이시여……. 천만다행입니다, 성녀님. 무사하셨군요.”
플레온 사제는 떨리는 손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양새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플레온 사제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플레온 사제를 채근했다.
일단은 나도 이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던 건지 알아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불안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옥죄고 있었다.
다니엘의 죽음 이후로 이곳에 오면서 내내 바라고 또 바란 것이 있었다.
부디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아니기를.
“그것이…….”
플레온 사제는 내 채근에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린 플레온 사제가 뒤늦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겪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 모든 일의 범인은 바로 데이릭 모어입니다, 성녀님.”
“…….”
예상하던 답변이 플레온 사제의 입에서 들려왔다.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이 가진 힘이 악룡의 힘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부터 줄곧 데이릭이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였다. 그의 과거를 알고, 함께 자라 왔으니 가급적 데이릭이 이 일과 연관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플레온 사제는 데이릭이 이 일의 주범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길게 숨을 뱉어 낸 후 이내 고개를 들어 플레온 사제와 눈을 마주쳤다.
“……데이릭이요?”
“예.”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여 묻자 플레온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듣고 싶어요.”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플레온 사제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언급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리고 나와 제프리가 황성 감옥으로 향한 그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마력탄 같은 것이 신전으로 쏟아졌다는 것이었다.
플레온이 말하는 마력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곳으로 오기 직전 나와 제프리가 겪었던 것과 동일한 부류의 힘일 듯했다. 사악한 힘을 응축시켜 마치 폭탄처럼 사용하는 것.
잔해를 보니 그 부분은 더 확인할 것도 없었다.
황성 감옥 역시도 이와 비슷하게 부서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데이릭이 정말 그 힘의 주인이라면 아마도 우리가 겪은 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힘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임시로 힘을 받은 다니엘과 달리, 제프리는 원래부터 그 힘의 주인이었으니까.
어수룩하게 응축하여 쏘아 보낼 뿐인 다니엘의 공격과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데이릭의 공격 때문에 신전이 이렇게 된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작게 탄식을 터트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니길 바랐던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확인받으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어째서 데이릭이?
내가 데이릭을 지켜본 것만 14년이었다.
그동안 이곳 듀아나 신전의 보육원에서 지내고, 성인이 되어서는 듀아나 신전의 잡일을 도맡아 하게 된 것을 내가 똑똑히 지켜보았다.
비록 데이릭은 듀아나 여신님의 힘이 닿는 신전에서 지내는 것을 힘겨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조짐이 있었다면 자주 찾아왔던 내가 제일 먼저 알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까지도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번거로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내가 아는 데이릭이라면 이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정말 데이릭이 맞습니까?”
내가 차마 플레온 사제에게 확답을 요구하지 못하는 사이, 제프리가 플레온 사제를 향해 질문했다.
플레온 사제는 고개를 들어 제프리를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듀아나 여신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신전을 습격한 사람은 데이릭 모어였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제프리의 물음에 확답을 주었다.
이로써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 데이릭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