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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36)화 (136/174)

136화

내 눈물을 닦아 준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미라벨 너한테는 그 일들이 꿈이라서.”

“…….”

나는 조용히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런 꿈을 꾸거든 얼른 잊어버려. 미라벨 네게는 널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으니까.”

제프리의 말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이런 얄팍한 말로나마 제프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 해서 꺼냈던 말이었건만, 오히려 내가 제프리에게 위로받아 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속이 간지러운 것처럼 낯설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독한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얼굴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제프리를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프리, 그럼 네 곁에는 내가 있을게. 그러니까 오늘처럼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날에는 날 찾아와.”

제프리의 파란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듯했다.

말이 없는 제프리를 바라보며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제프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졌다면 그뿐이었다.

* * *

그 이후로도 술을 두 병이나 더 비운 제프리는 술에 취해 조용히 잠들었다.

생각보다 주사는 없는 편인 듯했다.

나는 그런 제프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를 침대에 옮겨 두었다. 커다란 장신에 근육이 적당히 붙은 그의 몸이 제법 무거웠으나, 그래도 나 역시 매일같이 검술 훈련을 받아 왔기에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프리를 침대에 눕히자 제프리가 게슴츠레 눈을 떠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이 들어? 으앗!”

이제 좀 괜찮나 싶은 찰나에 제프리가 내 팔을 붙잡아 힘을 주어 당기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제프리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제프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라벨.”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내 이름이었다.

나는 벗어나려던 것을 잠시 멈추고 제프리의 말에 집중했다.

잠시 시간이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미라벨, 넌 죽지 마.”

제프리가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중얼거렸다. 적당히 열 오른 체온이나 심장 고동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다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짧은 대답을 마치고 나를 끌어안고 있던 제프리의 손을 풀어냈다. 제프리는 이번만큼은 순순히 나를 놓아 주었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벌써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제프리의 은색 머리칼이 하늘빛에 붉게 물드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과거의 내가 알던 제프리와 지금의 제프리가 다른 점은 머리칼의 길이였다.

길지 않았던 그의 머리가 이번에는 장발인 이유.

되짚어 보면 내가 제프리의 머리를 보며 예쁘다고 했던 그 시점부터 그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잠든 제프리의 머리칼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긴 후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내 일부인 신력이 하얗게 빛을 뿜으며 내 손 주변에 어렸다가 이내 제프리의 몸에 흡수되었다.

나는 내가 끌어낸 신력이 제프리에게 흡수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제프리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 정도면 깨어나더라도 숙취는 없을 것이었다.

“잘 자, 제프리.”

제프리가 잠든 것을 다시 확인하고 그의 방에서 나왔다.

“작은 아가씨!”

1층으로 내려가니 아니타가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보아하니 기다리는 동안 용병들과 게임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아니타, 이제 가자.”

“네, 알겠습니다.”

아니타는 대답을 마치고 들고 있던 카드패를 내려놓았다. 주변에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니타는 미련이 없는 듯했다.

아니타와 함께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 저택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내내, 만일 내가 좀 더 과거로 돌아갔다면 제프리의 가족들을 구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이었다.

* * *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성녀로서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익숙하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듀아나 여신의 은총을 내려 주었다.

한참 일을 마치고 나오니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성녀님.”

사제 두 명을 대동한 채 데이릭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좀 괜찮아?”

아무래도 데이릭은 사제들에게 감시당하는 입장이었으니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데이릭은 오히려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꼭 높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지 뭡니까? 세상에 제가 언제 이런 높은 사제님들을 대동하고 돌아다녀 보겠어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데이릭의 모습에 나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제프리랑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제프리는 왜?”

뜬금없는 데이릭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 그의 부모님 기일로 함께 술을 마신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내가 의아해하자 데이릭이 이해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런 게 있습니다.”

“뭔데 그래?”

“아니에요. 나중에 확실시되면 말씀드릴게요. 아니지. 내가 말씀드리면 안 되는구나.”

혼자 말하고 혼자 답을 구한 데이릭이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도통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동안에는 별다른 일 없었습니까? 또 그 존재가 나타난다든가.” 나타난다던가.

이번에는 데이릭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그가 대사제 두 명을 대동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까닭이었다.

“아직은 없었어.”

“흠, 얼른 그 힘을 쓰는 자가 나타나야 제가 자유로워질 텐데 말이에요.”

“그러게.”

나는 응원과 위로의 의미로 데이릭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데이릭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말 뿐이었다.

“밖에 제프리 있으니 만나고 가세요.”

“응. 그럴 생각이야.”

안 그래도 며칠 지났으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조사 결과가 있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제프리는 그가 조사하는 일이 악룡과 관련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후부터 신전과 공조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역시 이 일을 알고 있었기에 황실에서도 조사에 도움을 주는 모양이었다.

데이릭과 헤어지고 바깥으로 나와 보니 제프리가 플레온 사제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 모두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했다.

“성녀님, 나오셨군요.”

“……미라벨.”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플레온 사제와 달리 제프리가 조금 느린 속도로 나를 불렀다.

나는 제프리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요?”

“일단 그 주변에서 목격된 자들을 찾고 있는데.”

제프리가 내 말에 대답하며 잠시 말을 끌었다. 그 순간이었다.

쾅, 커다란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확인했다. 허공으로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뒷덜미가 오싹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일전에 신전을 습격한 기운과 같은 종류였다.

“어디지?”

“글쎄. 거리가 너무 멀어서 확인이 안 될 것 같아.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제프리도 기운을 감지했는지 한 손으로 검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만을 보고서는 어디서 일이 터진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제프리의 말대로 직접 가 보는 수밖에.

나는 황급히 플레온 사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플레온 사제님, 말을 좀 빌릴게요.”

“예? 예,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플레온 사제에게 말을 마치고 곧장 신전의 마구간을 향해 달려갔다. 제프리 역시 나를 따라왔다.

신전의 마구간지기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매여 있는 말 두 필을 풀어냈다. 그리고 고삐 하나를 제프리에게 넘기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잡았다.

단숨에 말 위에 올라타고는 말을 몰기 시작했다.

연기와 기운을 감지하며 달려가는 내내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릭의 주변에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일전에 만난 자는 악룡의 힘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멀리에서도 그자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데이릭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제삼자일 확률도 있었다.

그런데 말을 타고 향하는 방향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말을 달린 끝에 폭파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 망연한 기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긴…….”

폭발이 일어난 곳은 황실 감옥이었다. 그곳은 내 작은할아버지이자 원수인 다니엘이 구금되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으하하하!”

익숙한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아니겠지, 싶은 마음에 이를 악다물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에는.

“어서 오거라, 미라벨. 오랜만이구나.”

다니엘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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