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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35)화 (135/174)

135화

데이릭이 한동안 대사제들의 감시를 받게 된 이후로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차라리 무슨 사건이 일어날 조짐이라도 보이면 데이릭에 대한 의심을 좀 내려놓을 수 있을 텐데, 정작 데이릭이 감시를 받게 된 이후로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으니 미묘한 감정이 앞섰다.

아주 불쾌하게도 가장 먼저 든 것은 데이릭에 대한 불신이었다.

혹시 데이릭이 그렇게 억울함을 토로해 놓고 사실은 범인이 맞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말 악룡의 힘이 맞는 걸까?

공기 중에 신력을 풀었을 때 느꼈던 그 기운은 내가 익히 알던 악룡의 힘과는 조금 달랐다.

느낌은 같은 듯했지만, 계열은 다른…….

온전히 악룡의 힘이라고 하기 어려운 그 힘의 주인공이 과연 데이릭이 맞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를 어째야 하는 걸까?

이어지는 생각을 고개를 터는 것으로 지워 버린 나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공기 중에 신력을 풀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퍼진 신력은 공기를 타고 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수도 곳곳을 훑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쉬움을 느끼며 신력을 회수한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을 벗어났다.

의문의 힘을 사용하는 존재가 나타나고, 또한 악룡의 힘을 사용하는 데이릭이 대사제들에게 감시를 받게 된 이후로 나는 매일 제프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더 자유롭게 조사를 진행할 수 있고, 그만큼 정보를 얻기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프리가 쫓는 부랑자 실종 사건의 범인이 동물 실종 사건의 범인과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으니 그를 자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오늘도 오셨군요?”

제프리가 머무는 여관에 도착한 나에게 누군가가 인사를 건넸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니 제프리의 용병단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제프리는?”

당장 있어야 할 제프리가 없어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았다.

“아, 그게…….”

그러나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 그의 말을 기다리자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방에 계실 겁니다.”

“방에?”

제프리가 혼자 방에 있는 게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왜 이렇게 뜸을 들이며 말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가 말을 곁들였다.

“네. 오늘은 심기가 불편하여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했거든요. 하지만 성녀님이라면 들어가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했다.

“방까지 안내해 드릴까요?”

“아냐. 내가 갈게.”

나는 대답을 마치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프리가 사용하는 방 앞에 멈추어 섰다.

“노크할까요?”

“아냐. 내가 할게. 그리고 아니타, 안으로는 나 혼자 들어갈 거니까 아래서 좀 쉬고 있어.”

“예, 작은 아가씨.”

아니타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똑, 맑게 퍼지는 소리에도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복도를 조용하게 울렸다.

“오늘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윽고 방 안에서 제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에 문 너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프리, 나야. 미라벨.”

“…….”

나를 밝히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도 되나 싶어 망설이는 찰나에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왔어?”

문을 열고 선 사람은 제프리였다 제프리는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 달리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났다.

“술 마셨어?”

“……조금?”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술 냄새가 너무 독했다. 냄새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들어가도 돼?”

제프리는 내 물음에 망설이는 듯하다가 옆으로 몸을 비켜 주었다.

“들어와.”

나는 그를 지나쳐 그가 머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머무는 방은 이 여관에서도 제일 좋은 방이었다. 넓고 쾌적한 방이었으나, 그와 어울리지 않게 테이블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술병과 빈 술병이 여러 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가 마시던 중인 모양이었다.

나는 눈치껏 테이블 옆자리에 앉았다. 제프리는 망설이다가 원래 그가 앉아 있었을 자리에 앉았다.

“오늘 무슨 일 있어?”

불과 이틀 전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술독에 빠진 듯한 모습을 마주하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니, 그냥.”

“그냥?”

“……응.”

나는 제대로 말하지 않고 내 눈을 피하는 제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은 그가 슬퍼 보이는 것 같았다.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대신 같이 마셔 줄 수는 있어.”

“술을? 미라벨 네가?”

“왜? 못 마실 것 같아?”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제프리가 당황하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새 잔을 꺼내 내 앞에 두고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그리고 제프리의 앞에 놓인 잔에도 술을 채워 주었다.

“많이 마시는 건 반대지만, 그래도 너무 취할 것 같으면 말해. 내가 다 치료해 줄 테니까.”

내가 술잔을 들어 보이며 말하자 제프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 일렁거리는 듯도 했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내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조심스럽게 부딪쳤다.

짠, 하고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프리는 곧 들고 있던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술잔을 기울였다.

도수가 높은 럼주였다. 스트레이트로 마시니 속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으, 속이 뜨겁다.”

“무리면 마시지 마.”

“일단 좀 두고 보고.”

“그래, 그럼.”

제프리는 말을 마치고 다시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너무 빠른 속도였다.

오늘따라 제프리가 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는데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가만히 그의 술친구가 되어 주었다.

순식간에 몇 순배일지 모르는 술잔을 기울였다.

술기운을 신력으로 날려 버린 덕분에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도 취한 티라곤 나지 않는 제프리가 놀라웠다.

“사실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프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부모님 기일이야.”

예상치 못한 제프리의 말에 나는 그만 애매하게 술잔을 들었던 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솔직히 궁금해하긴 했지만, 짐작하지 못한 이유였던 탓이었다.

제프리는 그런 나를 보더니 픽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굳지 않아도 돼. 오래된 일인걸.”

오래된 일이라고 말하는 제프리의 모습은 유난히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제프리.”

내가 조심스럽게 제프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제프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아냐.”

나는 그에게 꺼내려 했던 말을 속으로 삼킨 채 고개를 저었다.

감히 제프리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제프리를 응시했다.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자꾸만 그에게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불현듯 제프리가 중얼거렸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프리의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돈을 빌렸다가 터무니없이 비싼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고리대금업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어린 제프리가 투정을 부린 것은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로 그의 가슴에 박힌 것은 자신의 말이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었다는 자책이었다.

그러나 제프리에게 죄는 없었다. 단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렀을 뿐이었다.

“제프리, 난 말이야.”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프리는 슬픔을 가득 채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웃음기 가득하던 제프리에게서 보기 어려운 눈이었다.

“가끔씩 꿈을 꿔. 내가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꿈. 거기서는 아빠도, 엄마도, 그리고 지금의 내 가족들도 모두 목숨을 잃어.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사실 꿈이라고 말했지만, 단순한 꿈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과거로 회귀하기 전의 일.

그때의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정도로 괴로웠다. 지금에서야 내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끝끝내 다니엘에게 죽임을 당했으니까.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용서와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쓰지만 결국 닿지 못해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믿었던 동생의 손에 죽임을 당해. 그 모든 걸 내 눈으로 목격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었어. 심지어 어떤 것은…… 내가 어리지 않았음에도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있어.”

제프리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내 속을 파악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거, 정말 꿈이야?”

문득 제프리가 내게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 제프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프리는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눈물을 흘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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