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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34)화 (134/174)
  • 134화

    데이릭이 우리보다 앞장서서 걸었다. 그의 뒤를 따르며 뒤에서 에이드리안과 제프리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화의 요지는 하나였다.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며, 또 왜 데이릭이 의심을 받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제프리는 선뜻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데이릭의 개인적인 이야기였기에 단순히 가십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궁금한 게 많으신 모양이군요, 황태자 전하.”

    오히려 에이드리안의 의문을 듣고 입을 연 것은 데이릭이었다.

    “불편한 질문이었다면 넘어가도 되니 심려치 말게.”

    에이드리안이 데이릭을 향해 말했다.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었다. 데이릭은 뒤를 돌아 에이드리안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악룡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만한 소리였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우리의 대화에서 몇 번이나 악룡이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는지 되묻거나 황당해하는 대신 조용히 데이릭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성녀님의 말에 따르면 조금 전 신전을 습격한 존재가 악룡의 힘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녀님께서 절 의심하시는 거고요.”

    “많은 것이 생략된 듯하지만 짧게나마 대답은 되었네.”

    “그거 다행이군요.”

    데이릭이 말하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는 침묵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침묵이 우리 네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네 사람 중 그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황 파악이 덜 끝난 에이드리안과 제프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상황을 알고 데이릭이 어떤 결정을 하는 건지 인지하고 있는 나는 더더욱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가장 심란할 데이릭은 더할 나위 없을 테고.

    그나마 숙소에서 신전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신전 회의실에 도착한 나는 다른 사제들을 호출했다.

    사제들이 회의실 내부로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은 깨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성녀님?”

    대사제들 모두 회의실에 모이고 난 후, 바론 대주교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내 주변에 있는 데이릭과 제프리,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상한 조합이긴 했다. 그들의 중심에 내가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조합이었다.

    “아까 신전을 습격한 이를 쫓아가시는 것은 확인했습니다만……. 지금 회의를 소집한 것은 그 때문입니까?”

    “네, 맞아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회의를 소집했어요.”

    나는 순순히 수긍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신전을 습격한 자는 며칠 전 저와 제프리가 마주쳤던 기묘한 능력을 가진 자와 비슷한 힘을 사용했습니다.”

    “사람을 가루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맞아요. 그리고 그자를 상대하다가 아주 중요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게 뭡니까?”

    성질 급한 사제 하나가 내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 질문했다. 나는 그런 사제를 한번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에게 악룡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렇다는 말은…….”

    “악룡의 힘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차분히 대답하자 금세 회의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제들의 시선은 데이릭을 향하기까지 했다.

    “자자, 다들 진정하십시오.”

    바론 대주교가 혼잡스러워진 회의실을 진정시켰다. 곧 소란스러웠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론 대주교는 침묵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지금 이곳으로 데이릭을 데려온 이유가 있겠군요.”

    “네.”

    “제가 말하겠습니다.”

    데이릭이 내 말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천천히 사제들을 둘러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다들 절 의심하고 계신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데이릭의 질문에 회의실에 있던 사제들은 입을 다물었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데이릭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상황에 씁쓸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이해합니다. 의심할 수밖에 없겠죠. 저였어도 의심했을 겁니다.”

    데이릭이 순순히 인정했다. 사제들은 그런 데이릭의 모습에 되레 침음을 삼켰다.

    “그러니 제가 하나 제안을 하겠습니다. 제게 감시할 사람을 붙여 주세요. 필요하다면 형구를 채워도 됩니다. 제 순수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습니다.”

    데이릭은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부분에서 약간의 힘을 주어 말했다.

    정말로 억울한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데이릭의 말에 반응한 것은 라이넬 사제였다. 라이넬 사제는 조심스러워하며 데이릭의 눈을 응시했다. 데이릭 역시 라이넬 사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 계속 의심받을 테니까요. 제가 악룡의 힘을 타고난 이상.”

    데이릭이 말을 마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난히 그 한숨이 무겁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데이릭의 생각이 그렇다면 저도 그렇게 하는 게 데이릭이나 신전을 위해서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라이넬 사제가 데이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의견을 더하자 다른 사제들 역시 임시로나마 데이릭을 감시하는 것을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 제안대로 사제들이 돌아가며 그를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사제들이 함께할 테니 불편한 일이 있어도 부디 노여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데이릭 모어.”

    바론 대주교가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여 데이릭에게 전달했다. 데이릭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만 한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두 명씩 돌아가며 데이릭 모어의 감시를 맡을 테니 그 부분은 사제들끼리 따로 일정을 확인하며 정하는 게 좋겠군요.”

    바론 대주교의 말이 끝나자 사제들이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데이릭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빈 자리에 앉았다. 조금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미안해, 데이릭.”

    정말 데이릭이 무고하다면 단지 악룡의 힘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데이릭을 의심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데이릭을 향해 사과했다.

    데이릭은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픽 미소를 지었다.

    “아뇨. 이렇게 해서라도 억울함을 푸는 게 낫죠. 미래를 위해서라도.”

    데이릭은 퍽 어른스러운 듯한 태도로 사제들이 일정을 조율하는 현장을 팔짱 낀 채 주시하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순서가 정해졌다. 데이릭은 가장 먼저 그를 감시할 인원으로 정해진 두 사람을 따라 천천히 회의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를 따라갈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만 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데이릭, 난 이만 가 볼게.”

    “벌써요?”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나를 확인한 데이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내가 수긍하자 데이릭은 입술을 매만지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봬요. 그때는 성녀님의 의심이 풀렸으면 좋겠군요.”

    데이릭이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데이릭이 사제 두 명과 함께 신전 복도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후에야 몸을 돌려 나왔다.

    그런 내 뒤를 제프리와 에이드리안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데이릭 모어에게 짧게나마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라벨. 나는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에이드리안이 불쑥 나에게 말했다.

    아까 들은 설명만으로는 부족했지만, 더 캐물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참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14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의 일을 천천히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설명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무래도 에이드리안이 내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욱 자세한 상황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는지 상황 설명이 끝나자 에이드리안이 턱을 매만지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데이릭 모어가 그 악룡의 부활에 관한 힌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군. 이번에 미라벨 너와 제프리가 쫓아간 그자 역시도 악룡의 힘이 새겨져 있었던 거고.”

    “맞아. 그래서 데이릭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악룡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데이릭뿐이니까.”

    내 말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한동안 데이릭 모어를 감시하면 알게 되겠군. 그런데 내 생각에는 데이릭 모어가 아닌 것 같아.”

    불현듯 에이드리안이 내게 말했다. 데이릭과 가장 짧은 시간을 함께한 그가 어떻게 데이릭을 그렇게 믿을 수 있는지 의아해졌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묻자 에이드리안이 기억을 더듬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까 너희들이 습격한 자를 쫓아갔을 때, 우리는 반대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너희도 알다시피 나와 데이릭 모어는 보육원을 통솔했고. 거기서 가장 적극적이었던 게 데이릭 모어였거든. 아이들도 데이릭을 잘 따르고. 그런 걸 보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에이드리안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까 우리가 찾아갔을 때 보았던 데이릭은 보육원의 아이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보육원 아이들의 부탁으로 실종된 고양이와 강아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

    자신이 한 일이라면 굳이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텐데도.

    그럼, 데이릭이 이 사건의 진범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사건의 범인이라는 걸까?

    어쩐지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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