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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32)화 (132/174)
  • 132화

    “빨리 왔네?”

    로브를 뒤집어쓴 자와 대치 중이던 제프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줄곧 로브를 뒤집어쓴 자를 향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빨리 수긍했어. 상황은?”

    “별거 없어. 보는 대로야.”

    제프리가 짧게 설명했다. 일단은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봐!”

    제프리가 불쑥 로브를 뒤집어쓴 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자가 반응하듯 이쪽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하얀 장갑 위에 검은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내가 느낀 그 기운과 일치하는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싶어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순간 그의 손 위에 뭉쳐졌던 기운들이 우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나와 제프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그자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기운이 바닥에 닿는 순간이었다.

    콰광!

    신전에 있을 때 느껴졌던 굉음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리가 뒤편에서 울려왔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로브를 쓴 자의 기운이 닿은 바닥이 심각할 정도로 넓게 패여 있었다.

    만일 그 기운을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나나 제프리 역시도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

    억지로 신력을 사용해 막는다 하더라도 빠른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정도의 위력이었다.

    일순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자를 확인했다.

    “저 기운에 닿으면, 그때 봤던 그 가루처럼 되는 걸까?”

    제프리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물었다.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결단코 실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저 기운에 닿는 것만으로 가루가 되어 기화한다면 그보다 허무한 결말은 없을 테니까.

    “조심해. 혹시라도 닿지 않도록.”

    “미라벨, 너야말로.”

    제프리가 내 말을 빠르게 받아쳤다.

    그때였다.

    “조심해, 미라벨!”

    제프리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드는 사특한 기운을 느꼈다.

    멀리서 날아드는 것이 아니었다. 기운은 바로 내 눈앞에서 생겨났다.

    이미 피하기는 늦은 상태였다. 생각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레피드를 들어 내 앞으로 날아든 사특한 기운을 잘라 내었다.

    그동안 검술을 훈련한 것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겠다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펑!

    기운이 레피드의 날에 닿자 마치 풍선이 터지듯 큰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그 충격파로 인해 그대로 뒤로 한 바퀴 구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제프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해.”

    신력을 운용하여 충격파로 인해 크게 뒤틀린 속을 진정시켰다.

    신력이 하얀빛을 일으키며 내 몸을 감쌌다. 그러자 곧 고통스러웠던 감각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공격을 통해 알아낸 것이 있었다.

    무형의 기운을 레피드로 잘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충격은 있었지만, 적어도 그 공격에 대응하여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힌트가 되었다.

    신력을 이용하면 충격파 없이도 기운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레피드가 통한다는 것은 곧 신력이 먹힐 거라는 의미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새를 놓치지 않고 그자가 다시금 사특한 기운을 쏘아 보냈다.

    이번에는 제프리를 향하고 있었다.

    제프리는 최대한 집중력을 모은 상태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자신의 몸에 가까이 왔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옆으로 굴렸다.

    쾅!

    제프리가 있던 자리가 크게 패였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빠르게 도약해 나갔다. 내 목표는 가만히 서서 기운만 쏟아 내는 정체불명의 사람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 마지막으로 몸을 낮게 웅크린 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치듯 레피드를 휘둘렀다.

    그자가 뒤로 물러나 내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레피드의 끝이 그자의 로브를 길게 잘라 내었다.

    이윽고 로브 속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뭐야”

    “왜 그래, 미라벨?!”

    내가 당황해서 헛숨을 삼키자 멀리서 제프리가 이상함을 느끼고 소리쳤다.

    “다리에…….”

    “다리?”

    앞뒤 잘린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프리가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제프리는 내가 말을 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악룡의 표식이 있구나.]

    비브르가 중얼거렸다. 차마 내가 언급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내 어깨에 매달린 상태로 남자의 다리를 본 것 같았다.

    탄식이 섞인 비브르의 목소리에 나는 길게 숨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확인했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적으로 인식하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악룡의 힘을 지닌 자는 수호룡의 선택을 받은 나를 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재빠르게 남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남자는 마치 내 동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사이 제프리가 내 옆으로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설명은 나중에 해 줄게. 제프리, 저 사람 붙잡아야 해. 이용당하는 중이야.”

    “이용?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녀석을 제압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근데 제압만으로 되겠어? 그 기운은 가만히 있어도 쓸 수 있는 것 같던데.”

    “그건 걱정하지 마.”

    “……알았어.”

    제프리는 궁금증을 속으로 꾹꾹 집어넣은 채 검을 세워 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휘두르는 검보다도 더욱 묵직하고 빠른 그의 검이 남자를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사특한 기운은 발견하는 즉시 레피드를 사용하여 잘라 버렸다.

    몇 번 터지는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넘어질 뻔하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못 받아칠 정도는 아니었다.

    “악!”

    그사이에 남자에게 가까이 접근한 제프리가 폼멜로 남자의 뒷덜미를 세게 가격했다.

    그 짧은 공격에 남자는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행히도 제프리가 남자를 한 손으로 받아 내어 바닥에 얼굴부터 떨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돼?”

    제프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한시름 놓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고마워. 일단 이쪽에 눕혀 줄래?”

    제프리를 향해 부탁했다. 그러자 제프리는 내가 가리킨 방향에 남자를 눕혀 두었다.

    누워 있는 그를 살피니 더더욱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 악룡의 힘으로 지배받고 있어.”

    “뭐?”

    내 말에 제프리가 놀라서 되물었다.

    나는 자세한 설명은 확인한 이후에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레피드를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악룡의 흔적이 새겨진 그의 허벅지를 향해 깊이 박아 넣었다.

    레피드가 남자의 허벅지에 깊게 박히자 허벅지에 새겨졌던 악룡의 흔적이 천천히 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것으로 확정이었다.

    그가 악룡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하지만 어떻게?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악룡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데이릭뿐이어야 할 터였다.

    다른 자가 있다면 다니엘일 것이고.

    그렇지만 다니엘은 황실 지하 감옥에 갇힌 상태였고, 데이릭은 신전에서 보호받은 채 잘 자라 왔다.

    그럼 지금 이 힘은 대체 누가 쓴 거라는 말일까?

    나는 레피드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와 동시에 신력을 사용하여 남자의 허벅지에 있을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제프리, 이자를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 도와줄래?”

    “그래. 누구 부탁인데.”

    제프리는 불평 없이 남자를 들쳐 멘 채 신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제프리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해 준다면서.”

    제프리가 가는 길에 내게 물었다.

    “이 사람, 악룡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

    “뭐? 데이릭의 몸에 잠재된 그거랑 같은 거?”

    제프리는 14년 전의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는지 황당해하며 내게 되물었다.

    “응. 근데 이상해. 이 기운은 내가 아는 그런 악룡의 기운도 아니고, 무엇보다 악룡의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데이릭밖에 없을 텐데.”

    내 말에 제프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건 제프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데이릭이 신전 보육원에 들어온 이후로 내가 줄곧 그를 지켜봐 왔었다.

    설마하니 데이릭이 악룡의 힘을 각성하여 이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신시아의 부탁으로 사라진 고양이와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사람이 바로 데이릭이었다.

    “가서 확인해 보자.”

    제프리는 당혹스러워하는 나를 달래듯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에서는 성기사들이 건물 잔해를 치우고 있었고, 사제들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다.

    혹시나 데이릭이 정말 이 일의 주동자라면 신전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성녀님!”

    라이넬 사제가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나를 향해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여긴 좀 어때요?”

    “일단 복구하는 중입니다. 부상 당한 사람들이 좀 있어서 치료하는 중이고요. 성녀님께서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라이넬 사제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입매를 억지로 틀어 웃음을 지은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이넬 사제님, 혹시 데이릭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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