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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28)화 (128/174)
  • 128화

    “그게 무슨 말이야?”

    작은 소리였지만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응접실에는 에이드리안과 나, 둘만 있었기 때문에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음? 아, 만일 부랑자 실종 사건과 동물 실종 사건에 연관성이 있다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사건의 시작이 더 오래전이었을 거라는 말이야.”

    “얼마나 오래되었는데?”

    내 물음에 에이드리안은 생각을 되짚어 보기라도 하는 듯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가늘게 눈을 좁힌 채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에이드리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 1년도 더 전인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네.”

    “그럼 이전에도 동물 실종과 관련된 보고가 너한테 올라왔던 거야?”

    내가 의아함을 참지 못하며 묻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응. 하지만 그렇게 눈에 띌 만한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주제였어. 수도의 새들이 사라진다거나 유해 동물인 쥐가 사라졌다든가 하는 그런 일들로 보고가 된 적이 있거든.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는데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나조차도. 그때부터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에이드리안이 초기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긴 숨을 토하며 말을 뱉어냈다.

    “적지 않은 수의 부랑자들이 실종되었어. 아직은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해서 실종이라 하고 있지만, 난 왠지 그들이 죽었을 것만 같아. 실종 사건이 동물에서 사람으로 옮겨갈 줄 알고 미리 조치를 취했더라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후회를 해 봐야 바뀌는 것은 없을 터였다. 나는 에이드리안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자책하지 마. 그때는 몰랐잖아. 그리고 아직 두 일이 관계되어 있을 거라는 건 나나 신전의 추측일 뿐이고. 만일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라면 치밀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어. 작은 동물들부터 이제는 사람으로까지 번진 거잖아. 게다가 실종된 사람은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든 부랑자들이었고.”

    그나마도 의아함을 느낀 경비대가 조사를 시작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도 아니었으면 사건이 더 커진 후에야 조사가 이루어질 뻔했다.

    이를 계획한 것이 신력을 깨트린 그자라면, 그는 최소한 1년 전부터 치밀하게 이 일을 계획했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들키지 않도록 동물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그 대상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경비대에서 심각성을 인지하고 부랑자들을 따로 대피시켜 놓은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문제 해결방법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자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났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더 대담하게 나올지도 몰랐다.

    “신전에서도 이 일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는데 혹시 더 아는 거 없어?”

    에이드리안이 불쑥 나를 향해 물었다. 급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신전에서 이 일을 주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나마도 오늘 내가 제프리와 함께 수상한 일을 경험해서 대두된 거야.”

    “수상한 일?”

    “응.”

    나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제프리와 있었던 일부터 말을 꺼냈다.

    제프리와 함께 있다가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고, 또 그 기운을 따라갔더니 사람 모양의 가루가 생겨 있었으며, 그 가루가 순식간에 기화되어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에이드리안은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가루가 정말…… 사람일까?”

    에이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우선 우리가 목격한 건 사람이 가루가 된 장면이 아니었다. 사람 모양의 형태로 쌓여 있던 가루가 어느 순간 기화되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사람이 가루로 변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그자의 함정이라면? 우리가 오해하도록 일부러 사람 모양을 만들어 둔 것은 아닐까?

    그럼 오히려 진실을 알아내는 게 더욱 지연될 터였다.

    “확신할 수는 없어. 일단 나랑 제프리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걸 본 건 아니니까.”

    내가 부정하자 에이드리안이 작게 침음했다.

    “역시 그렇겠지. 그럼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네. 이 일은 내가 정무 회의 때 한번 말을 해 볼게.”

    “응. 신전에서도 알아보고 있으니까 혹시 무슨 증거 찾으면 말해 줄게.”

    “나도 아는 거 있으면 미라벨 너한테 바로 알려 줄게.”

    에이드리안의 말에 나는 기꺼운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건이 내 예상보다 더 오래전부터 일어난 일이라는 것 외에 따로 알아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황태자인 에이드리안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황성에서도 경비대와 별개로 이 일을 더욱 진지하게 조사할 터였다.

    경비대의 의뢰를 받은 제프리와 신전, 그리고 황성에서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건이니 아무래도 가닥이 더욱 빨리 잡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나저나 곧 있으면 미라벨 네 생일이지?”

    문득 에이드리안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응. 안 그래도 대공가에서 무도회를 열기로 했어. 조만간 준비되는 대로 초대장을 보낼 예정이야. 바쁘겠지만 시간 되면 꼭 와 줘.”

    나는 빙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제안했다. 내가 친구라고 부르며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가야지. 내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루비처럼 붉은 그의 눈동자가 곱게 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라벨 너, 무도회라면 혹시 파트너는 정했어?”

    “파트너? 딱히 생각해 보진 않았어. 필요하면 엘리엇이랑 같이 입장해도 되고.”

    내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대답하자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엘리엇에게는 약혼녀가 있잖아. 슈페른 백작 영애의 파트너로 입장할 텐데 엘리엇에게 부탁하긴 좀 그렇지 않아?”

    “역시 그렇겠지?”

    최근 약혼한 두 사람을 떠올리며 나는 순순히 에이드리안의 말에 수긍했다.

    약혼까지 했는데 내 파트너로 입장하는 건 역시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나 혼자 입장해도 상관없긴 한데.”

    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에이드리안이 나를 진지하게 주시했다. 조금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입장하는 건 어때?”

    숨을 고른 에이드리안이 나를 향해 물었다. 파트너 제안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혼자 입장하는 것보다는 친구인 그와 함께 무도회장에 입장하는 것도 좋을 터였다.

    “내 파트너가 되어 주려고?”

    “그래. ……싫어?”

    내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에이드리안이 머뭇거리며 내 의사를 확인했다.

    “아니, 네가 내 파트너가 되면 나야 좋지. 하지만 괜찮겠어?”

    “뭐가?”

    에이드리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향해 되물었다.

    “네가 계속 나랑만 있으려 하니까 황성에서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너도 벌써 스물한 살이잖아.”

    “그게 뭐 어때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나 외에 다른 영애들도 만나야지. 진작 약혼하고도 남았을 나이인데 못 하고 있잖아.”

    내가 팔짱을 끼며 그를 바라보자 에이드리안이 김빠진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뭔가 불만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라벨.”

    뜬금없이 에이드리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 달리 낮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왜?”

    괜히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붉은 눈을 들어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빨리 약혼했으면 좋겠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바라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넌 이 나라의 황태자고, 또 결혼할 의무가 있잖아. 그러니 약혼하는 건 당연한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에이드리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됐어.”

    “응? 뭐가?”

    “너도 황제 폐하와 크라이튼 대공녀의 일은 알 거야. 그치?”

    에이드리안이 뜬금없이 엄마와 황제의 일을 언급했다.

    “알지.”

    내가 대답하자 에이드리안이 곧장 왜 두 분을 언급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께 있었던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길 바라셔.”

    “아…….”

    나는 그제야 에이드리안이 왜 두 분을 언급했는지 깨닫고 쓰게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때의 일로 많이 힘들어하셨거든. 그래서 나에게는 이른 약혼을 강요하지 않겠다 하셨어. 내가 정말로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때에 약혼하여 결혼까지 할 수 있도록.”

    “그러셨구나.”

    황성으로 올 때면 황제나 황후가 나를 보며 자꾸 서운한 티를 내기에 나 때문에 에이드리안의 약혼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난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진 줄 알았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에이드리안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결혼할 사람은 내가 정할 거니까 괜찮아.”

    에이드리안이 짧게 대꾸했다. 그 말이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그래. 그럼 이번 무도회 파트너는 에이드리안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내가 조심스럽게 에이드리안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내가 해도 되겠어?”

    “응. 나야 해 주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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