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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27)화 (127/174)
  • 127화

    일찍 잠들었기 때문인지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천천히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피로는 어느 정도 가신 이후였다.

    비브르의 말대로 내게 물리적인 휴식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괜찮으냐?]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비브르가 나를 향해 물었다.

    ‘응. 훨씬 좋아. 어제 쉬길 잘한 것 같아.’

    대답을 마치고 나는 드레스룸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내가 훈련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고 훈련장으로 나오자 먼저 훈련하고 있던 엘리엇이 눈에 보였다.

    “오빠.”

    내가 엘리엇을 향해 다가가며 그를 부르자 그가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좀 늦었네?”

    항상 새벽 일찍 엘리엇과 수련을 하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피로로 인해 조금 늦게 나왔더니 엘리엇이 의아해서는 내게 물었다.

    “몸이 아픈 건 아니지? 어제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잠들었다고 들었는데.”

    “응. 아냐. 설령 아픈 거라고 해도 내가 치료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참, 황태자 전하께서 널 많이 보고 싶어 하시더라고. 생일 연회에 찾아오겠다고 날을 꼽으면서 기다리고 계시던데.”

    엘리엇이 에이드리안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전과 달리 황태자로서의 역할 때문에 에이드리안은 쉬이 바깥으로 외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내 생일 같은 커다란 이벤트가 있으면 시간을 내긴 했지만.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그래.”

    조만간 에이드리안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엘리엇과 대화를 마치고 내 검을 집어 들었다. 생각을 비우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몸을 풀고 머리를 비우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은 없었다.

    한참 몸을 쓰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브라이언이 훈련장으로 나왔다. 그는 나와 엘리엇의 자세를 잡아주며 검술을 봐주었다.

    모든 훈련이 끝난 뒤엔 가볍게 씻은 후 아침 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 기운의 흔적을 찾으려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러고는 내 집무실로 들어가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에이드리안으로, 내가 황성에 찾아가도 되는지에 대해서 묻는 편지였다.

    깔끔하게 마무리 인사까지 적은 후 편지를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그러고는 실링 왁스를 녹여 편지를 잘 봉해 두었다.

    “아니타, 이걸 황태자 전하께 전달드려 줘.”

    “예, 작은 아가씨”

    아니타는 내가 건네준 편지를 집어 들고 다른 하녀에게 일을 지시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다니엘과 악룡에 대한 사건이 일단락된 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내가 이번 실종 사건과 그 범인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단순히 실종 사건이라면 이리 신경이 쓰이는 일도 없었겠지만, 상대로 추정되는 이는 어쩌면 나보다도 더 고단수의 능력자일지도 몰랐다.

    신력을 간단하게 깨트린 것만 해도 그랬다.

    신력이 공기 중에 섞여 있는 것은 마나가 주변에 산재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내가 인위적으로 섞은 신력은 자연 속에 녹아 있는 신력과 달리 일부러 내가 엮어 낸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흐름을 여태껏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바론 대주교나 신전의 다른 사제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걸 알아차리는 사람이라고는 원래 성자의 자질을 타고난 플레온 사제와 신력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라이넬 사제뿐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나와 같은 성질의 신력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런 이질적인 기운의 소유자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신력을 감지하는 감이 뛰어나며 심지어는 그 미세한 흐름을 깨버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었다.

    악룡의 힘으로 추정되지는 않으니 악룡을 제외하고도 이런 힘을 가진 존재가 또 있다는 말도 되었다.

    나는 그 힘이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지금 시기가 다니엘을 처리한 후로 14년 뒤인 것이 더더욱 거슬렸다.

    시기상으로는 다니엘에 의해 크라이튼 대공과 내가 죽음을 맞이했던 때였으니 찜찜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집무실에 앉아 생각에 잠긴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이드리안에게 편지를 전하러 갔던 하녀가 다시금 집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보낸 것과는 다른 편지가 들려 있었다.

    “작은 아가씨,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는 답신입니다. 꼭 바로 확인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건넨 편지를 아니타가 받았다. 아니타는 내게 편지를 공손히 전달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편지를 앞뒤로 바라보다가 레터 나이프를 사용하여 편지를 뜯었다. 그러고는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편지를 보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편지 전반에 걸쳐 표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말미에는 오늘이라도 찾아오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초대였다.

    나는 어떻게 할까 잠시 편지를 보며 고민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성으로 갈 거야. 준비를 좀 해 줘.”

    “예, 작은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는 동안 나 역시 옷을 갈아입었다.

    저택에 있는 동안에는 활동하기 편안한 옷을 입었지만, 황태자인 에이드리안을 만나러 가는데 예의를 차리지 않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하늘색의 드레스를 입고 칼리나가 골라주는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칼리나의 손길이 스치자 평소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새침한 인상의 귀족 영애가 되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칼리나 솜씨 정말 좋다.”

    나는 모처럼 꾸민 내 모습에 만족하며 칼리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러자 칼리나가 재미있어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작은 아가씨.”

    “진심이야.”

    나는 짧게 대꾸한 후 파우더룸을 나섰다.

    “마차가 준비 되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듯 마차 역시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저택을 나와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느린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빨리 황성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오래 걸리지 않아 마차가 황성 현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려서자 아니타가 황급히 내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크라이튼 소공녀님.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성의 시종장 미리암이 내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나는 미리암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부탁해.”

    “예, 소공녀님.”

    미리암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응접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미리암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문이 열리고 에이드리안이 응접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라벨!”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에이드리안이 반가움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푼수 같은 얼굴이었지만, 오랜만에 보니 나 역시도 그가 반가웠다.

    “그간 무탈하셨어요, 황태자 전하?”

    내가 묻자 에이드리안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난 잘 있었어. 일단 앉아. 차는 뭘 마실래?”

    에이드리안이 빠르게 물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함께 들어온 시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밀크티로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나도 같은 걸로.”

    “예. 준비하여 대령하겠습니다.”

    시녀가 대답을 마치고 응접실을 나갔다. 이제야 응접실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이제 말 편하게 해. 우리뿐이니까.”

    에이드리안이 장난기를 머금은 얼굴을 한 채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실소했다.

    “그래. 오빠에게 들었어. 날 찾았다면서.”

    둘만 있는 자리에서 종종 말을 놓다 보니 이제는 그에게 말을 놓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에이드리안은 내가 반말하는 것을 퍽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래. 난 바빠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미라벨 넌 연락도 없고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 줄 알아?”

    에이드리안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내게 툴툴거렸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참, 그러고 보니 수도에 제프리가 와 있어.”

    “제프리가? 웬일로? 제프리는 어때? 잘 지냈대?”

    에이드리안은 제프리의 이름이 거론되자 반가워하며 물었다.

    “응. 당연히 잘 지냈지. 수도 경비대의 의뢰를 받고 한동안은 수도에 머무를 예정인가 봐.”

    “수도 경비대의 의뢰라면…… 그 실종 사건이구나.”

    내 말에 에이드리안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수도에서 벌어지는 중차대한 일들은 다 보고되는걸.”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마침 그와 관련해서 다른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온 거였기 때문에 에이드리안이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이 달가웠다.

    “그럼 혹시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신전에서도 이 일을 주목하고 있거든.”

    “듀아나 신전에서 실종 사건은 왜?”

    “사실은 사람만 실종된 게 아니야.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실종되고 있어. 그리고 그 범인이 보통 존재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짧게 에이드리안에게 설명했다. 에이드리안은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으로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동물이 실종된 게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면…… 아무래도 시발점을 더 길게 잡아야 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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