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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25)화 (125/174)
  • 125화

    제프리가 머무는 여관에서 벗어난 나는 아니타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악룡과 관련된 일도 아닌데 굳이 신전에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은 해 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수도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이니 신전이 미리 알고 대처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성녀님?”

    신전에 거의 다다랐을 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데이릭이 두 손 가득 짐을 든 채 내게 달려왔다.

    “신전으로 가는 길이신가 봐요?”

    “응. 데이릭 넌?”

    “저야 보다시피 심부름하고 돌아가는 길이죠.”

    데이릭이 양손에 든 물건을 내가 볼 수 있도록 들었다. 장바구니가 터질 듯 가득 차 있었다.

    “고생이 많네.”

    나는 빠르게 수긍하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나 줘. 내가 들어 줄게.”

    “예? 성녀님이요?”

    데이릭이 질색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성녀님의 도움을 받느니 그냥 힘들게 들고 가는 게 낫죠. 성녀님께서 제가 들고 있어야 할 짐을 나누어 들고 오면 다른 사람들이 절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래도 무겁잖아.”

    “됐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데이릭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신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이 먼저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데이릭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나는 걸음 속도를 빨리하여 데이릭의 옆에서 같이 걸어갔다.

    “데이릭, 어제 혹시 톰이나 카린 찾았어?”

    나는 은근슬쩍 그를 떠보았다.

    지금 내가 가장 의심하는 범인 중 하나가 데이릭이었다.

    물론 내가 느낀 그 기운은 데이릭이 갖고 있을 악룡의 힘과는 조금 다른 듯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요. 그럼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못 찾았어요. 근데 듣자 하니 시장에 있던 고양이들도 사라졌다는데요? 이거 신전 근방만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아무래도 문제가 좀 있는 거 같은데…….”

    데이릭은 영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얘기 나도 어제 시장에 들렀다가 들었어.”

    “성녀님도요? 성녀님께서 시장을 가기도 합니까? 아랫사람 안 부리고요?”

    내 말에 놀란 데이릭이 쏘아내듯 물었다.

    “어제 그냥 걷고 싶어서 걷다가 시장까지 가게 됐어.”

    “아, 전 또 성녀님께서 직접 장이라도 보시는 줄 알았네요.”

    데이릭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그 일 말고 별일 없었어?”

    “무슨 일이요?”

    내 말에 데이릭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없었어?”

    “없었는데요?”

    “그럼 됐어.”

    나는 대답을 마친 후 신전 계단을 올랐다.

    데이릭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럼 저는 보육원으로 가 보겠습니다.”

    신전에 도착하자 데이릭이 짧게 말하고는 보육원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회의실로 향했다.

    익숙하게 도착한 회의실을 보며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어 들어갔다.

    14년 전만 하더라도 다니엘로 인해 뻔찔나게 드나들었던 곳이 바로 회의실이었다. 그때는 허구한 날 사제들을 모아 회의했었는데, 다니엘을 잡고 일이 일단락된 이후로는 신전의 대소사가 있을 경우가 아니면 회의실에 모이는 일이 없었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안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 후에는 회의실에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익숙한 사제들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들 오랜만에 호출된 상황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인사를 마친 후 다른 사제들이 들어올 때까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회의실에 모든 대사제들이 모였다. 노쇠하여 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 바론 대주교의 자리만 비어 있을 뿐이었다.

    “성녀님, 오늘 왜 이렇게 사제들을 호출한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플레온 사제가 나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삼켰던 호흡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회의를 소집해야 할 정도의 일인가 고민이 많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신전 측에서도 이 일을 아시는 게 좋을 듯하여 사제분들을 이 자리에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소집한 의도를 껴서 말하자 회의실에 모인 사제분들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님께서 회의를 소집하셨다면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도 한달음에 달려올 테니까요. 염려치 마시고 편히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요. 그럼 어떤 일인지 우선 말씀드릴게요.”

    “네, 성녀님.”

    “최근 수도 내에 연쇄적으로 부랑자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아시는 분 계신가요?”

    내가 물어보자 사제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 차 물어보았으나 한동안 그들은 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싶어 내가 직접 입을 열려던 찰나에 다른 사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일에 대해서는 들은 듯합니다. 어제 그 일 때문에 용병들이 찾아왔었고요.”

    사제는 어제 제프리가 다녀간 일을 떠올리며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기억에 힘을 실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은 제 친구이자 용병인 제프리가 그 일을 수사하고 있어요. 경비대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서 용병인 제프리에게 수사 의뢰를 맡겼다고 해요.”

    “그랬군요.”

    플레온이 어제 제프리를 만났던 일을 떠올리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제프리가 수사를 하고는 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증거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실종 사건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시는 거라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죠?”

    “맞아요. 저도 처음에는 제프리가 수사하면 금방 수사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제가 수도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요.”

    “그게 무엇입니까?”

    “수도에서 사람 말고도 동물들 역시 계속해서 실종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아시는 분이 계실 줄로 알아요.”

    내가 말을 꺼내자 몇몇 사제들이 안다는 듯이 탄식을 터트렸다.

    “알고 있습니다. 현재 보육원에서 키우던 강아지 카린 역시도 실종이 된 상태죠. 처음에는 누군가가 카린을 풀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아닐 것 같아요. 이 근방 고양이들은 물론이고 시장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들까지 모두 실종되었어요. 그리고 어제는 카린이 실종되었죠.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해했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세 사건의 연관성을 사제들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저는 그 일을 이상하게 여겼어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는지 의아해서요. 그래서 제가 신력을 공기 중에 풀어 수도를 수색해 보았어요.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제 기운을 알아차리고 그걸 깨트렸어요.”

    “……신력을 깨트렸다고요?”

    “설마 다니엘이나 데이릭이…….”

    내 말에 사제들이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다니엘과 데이릭의 이름을 수군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조차도 그 두 사람을 의심했으니까.

    신력을 감지하고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힘이라고 하면 악룡의 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했다.

    “다니엘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그 전에 다니엘을 찾아갔는데 그가 악룡의 힘을 사용하는 일은 앞으로 없을 듯했어요.”

    내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생각 중 일부를 부정했다.

    만일 다니엘이 그 이질적인 힘의 소유자라면 얌전히 황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탈출하고도 남은 후겠지.

    하지만 내가 본 다니엘은 탈출은커녕 제대로 걸음도 걷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다니엘이 아니라면 설마…….”

    다른 사제 한 명이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전에서 보호한 데이릭 또한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느낀 것은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악룡의 기운과는 조금 달라서요. 일단 저도 데이릭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확신은 못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

    내가 대답하며 다시금 회의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신력을 깨트렸던 그 수상한 기운이 제 근처에서 폭사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황급히 그곳을 찾았더니 그곳에 사람의 형상을 한 가루가 남아 있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다시금 회의장이 어수선해졌다.

    “이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그 가루는 만지면 장갑이나 살을 태울 정도로 특이한 성질을 갖고 있더군요. 하지만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가루가 금세 기화되어 사라졌거든요.”

    “이번 실종 사건과 그 사건을 같은 사건이라고 보시는 거군요.”

    플레온 사제가 내 말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나 동물들, 그리고 사람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일. 연관을 짓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죠.”

    내 말에 회의실에 있던 이들이 수긍했다.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대주교님께도 전달을 드리고 신전에서도 인원을 투입하여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그리고 혹시 수상한 자를 발견하거든 말씀해 주세요. 신력을 감지하고 공기 중에 미세하게 퍼졌던 신력을 깨트릴 정도라면 보통은 아닐 테니까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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