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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22)화 (122/174)
  • 122화

    [무슨 일이냐?]

    내가 비명과 동시에 상체를 일으켜 거친 숨을 몰아쉬자 비브르가 놀라서 내게 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똑똑똑!

    “작은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내 비명을 들은 것은 문 너머의 아니타와 칼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일단 놀란 가슴 위로 손을 얹고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작은 아가씨. 문 열겠습니다.”

    비상 상황이라고 생각했는지 칼리나가 통보하듯 말하고 문을 거칠게 열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칼리나와 아니타를 확인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좀…… 깜빡 잠들었는데 안 좋은 꿈을 꿨나 봐.”

    “꿈이요? 괜찮으신 건가요?”

    칼리나가 근처에 있던 탁자에서 물 주전자를 들어 잔에 물을 채웠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물을 건네주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 들었다.

    신력이 순식간에 깨지듯 흩어진 까닭인지 손을 드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마치 비브르를 실체화했을 때가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신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을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격한 고통을 겪었다.

    내가 잔을 제대로 잡지 못하자 칼리나가 직접 잔을 들어서 내 입에 가져다 대 주었다.

    미지근한 물이 바짝 마른 입을 적시니 그나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식은땀 좀 봐요. 안 되겠다. 아니타, 수건을 좀 가져오렴.”

    “네, 금방 다녀올게요.”

    칼리나가 아니타를 향해 지시하자 아니타가 황급히 침실을 나갔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칼리나는 떨리는 내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침실 안에서 나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네…….”

    내 말에도 칼리나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아니타가 물이 담긴 바구니와 수건을 왜건에 감아 가져왔다. 그러고는 수건에 물을 적셔 내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악몽이 심했나 봐요.”

    아니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탓인지 처음처럼 격하게 반응하던 몸이 차츰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게. 나 때문에 칼리나랑 아니타도 놀랐겠다. 미안해.”

    내가 멋쩍은 듯이 말하자 칼리나와 아니타가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생겼든, 그렇지 않든 작은 아가씨를 모시는 게 저희의 일이잖아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아요.”

    칼리나와 아니타가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민망한 기분에 소리 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씻고 싶은데, 다시 목욕물을 좀 받아 줄래?”

    “예, 준비하겠습니다.”

    “응.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준비 다 되면 불러 줘.”

    “예, 작은 아가씨.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그럴게.”

    칼리나와 아니타가 머뭇거리다가 침실을 나섰다. 난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와, 대체 뭐였을까?”

    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비브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혹시 악룡의 기운이 느껴졌던 게냐? 그럼 다니엘? 아니면 데이릭 모어?]

    비브르도 놀랐는지 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지친 기분으로 길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 신력은 아닌 것 같았는데, 악룡의 기운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어.”

    [신력도 아니고 악룡도 아니다? 그럼 제3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게냐? 마법?]

    “마법? 마법이 이런가? 마법사를 제대로 만난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비브르가 자신의 뺨을 내 뺨에 가볍게 비볐다.

    느낌은 없어도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으며 조금 전 내가 느꼈던 기운을 곱씹었다.

    “신력을 그렇게 간단하게 깨트릴 수 있는 존재가 있나?”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알려 주련?]

    “응.”

    비브르의 부탁에 나는 조금 전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면에서 타격을 입었던 건지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신력을 공기 중에 흩트리고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나 확인해 보려고 했어. 비브르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하면 먼 곳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알 수 있잖아?”

    [그렇지.]

    “그런데 수도의 동쪽, 주택가에서 아주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 말했던 것처럼 신력도 아니었고, 악룡의 기운도 아닌 듯했어. 근데 그걸 느낀 순간, 그 기운이 공기 중에 흩어진 내 신력을 깨트려 버렸어.”

    [깨트렸다고? 신력을?]

    “그래.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신력이 접시나 그릇도 아니고 어떻게 깨질 수가 있겠어? 심지어 나는 공기 중에 신력을 퍼트린 거란 말이야.”

    내 신력을 공기에 스미듯 퍼트려 놓았으니 당연히 신력이 어느 정도 유기적으로 물려 있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상 누가 구름을 칼로 베어 갈라놓을 수 있을까?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공기 중에 퍼진 신력은 공기와 같은 흐름을 지니게 되었다.

    신력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공기를 부수는 것과 같은 힘이 작용해야 했다. 그게 가능할까? 나조차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감지한 누군가는 그 공기를 가르고 내 신력을 간단하게 무너뜨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위험인물이 수도에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실종 사건의 범인도 아마 그 사람이겠지.”

    [걱정이구나. 그 정도라면 미라벨 너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을 터인데, 애초에 너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는 게 보통은 아니니…….]

    비브르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게 고민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만 돌려 문을 바라보니 곧 아니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아가씨, 목욕물 받아 놓았습니다.”

    “응. 갈게.”

    나는 대답을 마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목욕을 마치고 나면 명상을 통해 신력을 좀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날이 되어서 나는 문제의 기운을 느꼈던 수도 동쪽 주택가에 이르렀다.

    이미 하루가 지나 버린 후였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그 사람을 찾는 건 무리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단서를 얻을 만한 곳은 이곳밖에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내가 어디서 그 기운을 감지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수도 동쪽의 주택가는 낡고 허름한 건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곳은 일전에 데이릭과 제프리가 하룻밤을 묵었던 여관뿐이었다.

    다니엘이 보낸 일행들로 인해 파손된 가게의 보상을 신전과 우리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건물을 새로 세울 정도의 보상금을 받았기에 여관 주인은 실제로 새로 건물을 올렸다. 그게 지금 눈앞의 건물이었다.

    그때의 일도 추억이라는 생각에 여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이 나왔다.

    “어?”

    가벼운 가죽 보호구를 착용한 용병으로 추정되는 남자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서 바라보는데 순간 그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뭐야?”

    “그러게요……. 이상한 사람 같아요.”

    아니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들어가 볼지, 아니면 이대로 지나칠지 고민에 빠진 사이에 문이 다시 열리며 이번에는 익숙한 사람이 얼굴을 드러냈다.

    “미라벨?”

    “제프리? 네가 왜 여기 있어?”

    안에서 나온 사람은 제프리였다.

    벌써 사흘 동안 매일 보게 된 제프리의 모습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왜 여기에 있기는? 우리가 묵는 숙소가 여기니까 그렇지.”

    “여기 머문다고?”

    “응. 안으로 들어갈래?”

    제프리가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제프리를 경계했다.

    수도 내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장소에 제프리가 있다고?

    물론 정확하게 장소가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갑자기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너 어제 뭐 했어?”

    “어제? 너랑 신전에서 만났지.”

    제프리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 이후에. 저녁 여섯 시 무렵에 뭐 했어?”

    “뭐 하기는? 저녁 먹었지. 저 녀석들이랑 같이.”

    제프리가 엄지를 들어 안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여관 안쪽에는 어제 보았던 그의 용병단 단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야? 어디 다른 데 간 건 아니고?”

    내가 믿지 않고 되레 되묻자 제프리가 심각한 기운을 느꼈는지 표정을 굳혔다.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제프리를 위아래로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나도 들어가도 돼?”

    “어? 어어, 그럼. 들어와.”

    제프리가 익숙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제프리의 손을 잡고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여관 내부는 깔끔했다.

    14년 전 새로 지은 건물이었으나 관리를 잘한 덕인지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성녀님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프리의 동료가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새 자리에 앉았다. 제프리의 옆자리였다.

    내가 사양하지 않고 앉자 앞으로 안주와 술잔이 놓이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혹시나 어제 내 기운을 깨트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력을 조금 사용하여 확인하였음에도 어제와 같은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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