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제프리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제프리가 마지막 신도였기 때문에 굳이 제프리가 먼저 나가길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제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뭐 해? 안 갈 거야?”
내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자 제프리가 괜히 딴청을 하며 헛기침했다.
무언가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뭔데 그래?”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제프리가 어색하게 내 시선을 회피했다.
도저히 제프리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프리가 힐끔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나한테도 은총인지 뭔지 해 주면 안 돼?”
어울리지 않게 주저하는 제프리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당황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프리는 내가 대답 없이 웃는 게 불만이었는지 인상을 쓰며 나를 바라보았다.
“싫어?”
“아니, 아냐. 해 줄게.”
여신님의 은총을 기원하는 게 그리 복잡한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제프리는 그제야 얼굴을 펴고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어떻게 하면 돼?”
“내 손을 잡아 볼래?”
내가 손을 내밀자 제프리가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대로 손을 움직여 제프리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제프리는 이런 행동 자체가 어색했는지 연신 이마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릴 때의 모습과 겹쳐져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웃으면 제프리가 너무 민망할 것 같아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날려 버렸다. 그런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 감아 봐.”
“응. 감았어.”
제프리가 곧장 내게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을 확인한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짧게 말을 마치고 눈을 떴다. 하얀빛이 제프리의 이마에 맺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제 됐어.”
나는 끝이 났음을 고하며 제프리에게 잡힌 손을 회수했다. 제프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끝이야?”
제프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싱겁고 허무했는지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응. 끝이야. 그래도 성녀인 내가 해 주는 거니까 효험은 있을 거야.”
나는 일부러 그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제프리는 나를 보며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어.”
제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의미가 맞았는지 제프리가 힘을 주어 내가 일어나기 편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고마워.”
“천만에.”
제프리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왠지 웃음이 나서 작은 소리로 웃었다.
제프리도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난 데이 찾으러 가 볼 건데.”
“지금?”
“응. 같이 갈래?”
제프리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이내 긍정했다.
“갈게.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나는 데이릭을 이번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확정해서 그를 범인으로 모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당장은 그가 신전에서 자라나 불행을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어릴 때 각성한 능력이 있으니 또 모르는 일이었다.
“성녀님, 댁으로 돌아가십니까?”
지나가던 플레온 사제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요. 데이릭을 좀 만나려고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세요?”
“데이릭이라면…… 신전 북쪽에 있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던 플레온 사제가 뒤늦게 데이릭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해 내고는 덧붙였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플레온 사제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신전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신전의 북쪽 방향은 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북쪽 후문으로 나와 데이릭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데이!”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제프리가 데이릭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데이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플레온 사제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은 찰나였다.
“무슨 일이야?”
어딘가에서 데이릭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나는 제프리와 눈을 마주쳤다. 제프리 역시도 나를 돌아보았다.
데이릭이 이곳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소리는 제법 먼 곳에서 들려왔다.
제프리와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데이! 어디에 있어?”
제프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나! 잠시만!”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데이릭이 커다란 나무 위에 있었다.
그러더니 나무를 타고 재빠르게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끙차! 어어, 찾았어?”
마침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선 데이릭이 숨을 길게 내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 위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데이릭에게 물었다. 뜬금없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릭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고는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신시아가 하도 톰이랑 카린을 찾아달라고 해서 혹시나 있을까 하고 올라가 봤습니다. 애들 말로는 이 근방에서도 목격됐다고 그랬거든요. 참, 카린 모르죠? 카린은 여기 보육원에서 키우는 누런 강아지예요. 크기는 사람 허벅지까지 오는 키에 덩치는 큰데 성격은 또 얼마나 순한지……. 지금 카린이 없어졌다고 보육원 애들이 얼마나 우는지 몰라요.”
데이릭은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며 말했다.
제프리는 그의 말을 듣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이런데도 데이릭이 의심스럽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확실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데이릭이 톰과 카린을 찾아다녔다는 것은 그를 신뢰할 만한 일이었다.
1차원적으로는 데이릭이 범인일 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정하기는 일렀다.
데이릭이 악룡의 힘을 쓸 때는 기억을 잃어버리니까. 그 스스로 힘을 사용하고 그 기억을 홀랑 잊어버렸다면 지금 그가 이렇게 톰과 카린을 찾아다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제프리 넌 아까 성녀님 만나러 간다더니 나한테 볼일이 있었던 거야?”
“가기 전에 인사나 좀 하려고.”
제프리는 나를 한번 흘긋 바라보더니 데이릭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데이릭은 용병인 제프리가 워낙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금세 수긍했다.
“벌써 가려고? 생각보다 금방 가네?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특유의 툴툴거리는 말투로 제프리를 향해 말한 데이릭이 이번에는 날 돌아보았다.
“성녀님은 또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톰을 찾는 거라면 저도 지금 노력 중이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아직까지도 안 보이는 거 보니 찾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아. 그래도 같이 고생해 줘서 고마워.”
데이릭의 말을 받으며 빙긋 웃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데이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데이릭이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였다.
“아니, 뭐.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 거니까요.”
아닌 척하면서도 데이릭은 의리가 있고 또 친절했다. 그런 데이릭을 의심했던 내가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릴 수는 없었다.
“톰은 아직 안 보이지?”
“네. 찾았으면 진작 돌아갔겠죠.”
“너무 무리하지 마. 신전에서도 카린이 없어진 일 때문에 여기저기 찾아보고 있다니까.”
“예, 걱정하지 마세요.”
데이릭이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프리 넌 이제 가는 거야? 수도는 언제 또 돌아와?”
“응? 나 안 가.”
“안 간다고? 방금은 간다며.”
데이릭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전에서 떠난다고. 나도 일행이 있으니까. 그래도 한동안은 일 때문에 수도에 머무를 거야.”
“그럼 이번 성녀님 탄신일에는 있는 거야?”
제프리는 데이릭의 물음에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일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럼 잘됐네. 신전에서 축제를 열 건가 봐. 너도 와서 편히 놀다 가.”
데이릭이 제프리를 향해 제안했다. 안 그래도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내용이었다.
“축제? 그러지, 뭐. 미라벨 너도 오는 거야?”
“나는 글쎄, 이번에 무도회를 연다고 해서 확답을 못 하겠어. 그래도 한번 시간 내 볼게.”
내가 긍정적인 답을 주자 제프리도 데이릭도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는 좀 더 톰을 찾아볼 테니까 제프리 넌 이만 볼일 보러 가. 성녀님도 여기서 험한 일 하지 마시고 이만 들어가서 쉬시고요.”
대화를 마치자 데이릭이 다시 나무를 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가는 길에 한번 더 찾아볼게.”
“그럼 좋죠.”
데이릭이 그 말을 끝으로 단숨에 점프하여 굵은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제는 내가 찾아보자고 해 놓고 지금 와서 말리는 것도 조금 마음에 걸려서 결국 데이릭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제프리는 제프리 나름대로 실종 사건을 수색해야 할 테고, 데이릭도 신전 북쪽에서 고양이를 찾고 있으니, 나 역시 시간이 남는 김에 골목 쪽을 좀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