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나는 이곳으로 나를 안내했던 간수를 따라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다니엘이 원망 어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굳이 돌아보거나 다시 내려가지는 않았다.
내가 이곳에 오려 했던 이유는 혹시나 다니엘이 나 모르게 악룡의 부활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른 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지하 감옥은 황실에서 파견된 경비병들로 인해 내부에서 탈출은커녕 외부의 인사들 역시도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나마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손녀이며, 듀아나 신전의 성녀라는 확실한 지위가 있었기에 별도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이렇게 출입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다니엘이 악룡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데이릭이 발현하는 악룡의 힘을 추출해야 했다.
하지만 데이릭은 14년 전 듀아나 신전의 보육원으로 들어가 줄곧 그곳에서 자라왔다.
악룡의 기운이 듀아나 신전의 기운과 상충되어 데이릭이 많이 힘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데이릭은 학대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일 데이릭이 그대로 다니엘에게 악룡의 힘을 제공했더라면, 데이릭은 모든 힘을 다니엘에게 빼앗긴 채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결말이 바뀌어 있었다.
연쇄 실종 사건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적어도 그 일이 다니엘이나 악룡과 관련된 일은 아닌 듯했다.
‘근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단 제프리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건 어떻겠느냐? 제프리라면 신뢰할 만한 정보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찜찜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뜯으니 비브르가 내게 조언했다.
‘그게 낫겠지?’
[그래. 안 그래도 미라벨 네가 제프리에게 결과를 알려 달라고 해 놓았으니 기다리고 있으면 제프리가 답을 줄 것 같구나.]
‘응…….’
나는 비브르의 말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려진 것은 수도 내의 부랑자들이 실종되었다는 것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제프리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게 나을 터였다.
제프리라면 인맥도 넓고, 용병단 인원도 많았으니 수색도 빠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별일 아니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혹시 작은할아버지를 따로 면회한 사람이 있어?”
나는 올라가다 말고 간수를 향해 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알려 줄 수 없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간수는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한 분께서 꾸준히 찾아오고 계십니다.”
“누구?”
다니엘을 꾸준히 찾아올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역시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짐작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크라이튼 대공 각하십니다.”
역시나.
간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이름에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14년 전, 다니엘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사건을 겪고도 꾸준히 다니엘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문제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그리 쉽게 연을 끊을 수는 없었던 것일 게 분명했다.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 외에 따로 방문한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감옥 건물을 나왔다.
바깥에는 아니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볼일 다 보신 거예요?”
아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 됐으니까 돌아가자.”
“네, 작은 아가씨.”
마차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제는 나와 겨뤄도 지지 않겠구나, 벨.”
새벽 훈련을 마치고 검을 내려놓는데 브라이언이 내게 말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브라이언을 돌아보았다.
“그럴 리가요. 저는 아직 멀었어요. 전 오빠처럼 토벌대에 동원된 적도 없고 경험도 적잖아요. 숙부님에 비할 바가 아니죠.”
나는 괜히 추켜세워 주는 브라이언의 말에 멋쩍은 듯 답했다.
확실히 어려서부터 브라이언에게 새벽마다 기사 수업을 받아 왔기 때문인지 이전에 용병 생활을 하던 때보다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대공가에서만 수련을 했지, 토벌대에 참가하거나 의뢰를 맡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검을 쓰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검술을 쓰게 되는 상황은 실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실전 경험이 축적되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잘 대처할 수 있을 터였다.
실전 경험은 지금처럼 대련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실전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오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용병으로 살며 실전을 충분히 겪어 왔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 실전 경험은 오래된 경험이었다. 햇수로 치면 14년 전의 일이었으니, 당장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실전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실전에 참가하고 싶으냐?”
브라이언이 나에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브라이언이 애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벨, 넌 타고난 감각이 좋으니 실전에 투입되더라도 무리는 없을 거란다. 하지만 알다시피 네 위치가 직접적인 전투에 동원될 만한 위치는 아니지 않니? 그래도 그만큼 평화롭다는 증거니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거라.”
브라이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지금의 나는 듀아나 신전의 성녀였다.
처음의 목적으로는 다니엘을 견제하고 악룡의 봉인을 막는 존재로서 이 자리에 선택된 것이었지만, 모든 것이 일단락된 지금은 악과 싸울 존재로서의 성녀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내 위치는 듀아나 신전에서 내리는 보상이었고, 세간의 상식으로는 내가 그런 험한 곳에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래.”
다니엘은 내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렸다. 아쉽기는 했지만, 강하게 열망하고 있던 일도 아니었기에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브라이언에게 가볍게 목례한 후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목욕을 마친 후 옷을 차려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이미 모두가 모여 있었다.
“오! 어서 오거라, 미라벨.”
내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크라이튼 대공의 얼굴에는 나를 향한 반가움만이 남아 있었다.
전날 찾아간 지하 감옥에서 크라이튼 대공이 다니엘을 꾸준히 찾아가고 있다는 걸 안 후라 그런지 크라이튼 대공이 걱정되었다.
나에게 다니엘이 처리해야 할 적이었다면, 크라이튼 대공에게는 몇십 년간 믿어 왔던 하나밖에 없는 형제였을 테니까.
그러나 괜히 내색해서 크라이튼 대공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내 자리로 가 앉았다.
“잘 주무셨어요?”
“그럼. 잘 자고말고.”
크라이튼 대공의 따뜻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러더니 곧 식당에 모인 다른 사람들을 한번씩 훑어보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 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곧 크라이튼 대공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며칠 후면 미라벨의 생일이구나.”
“벌써 그렇게 됐네요.”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엄마가 새삼스럽게 놀라며 말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를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인 다정한 얼굴로 엄마를 한번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무도회를 열고자 한다. 기왕이면 성대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럼요. 우리 조카의 생일인데 당연하죠.”
“저도 찬성이에요.”
브라이언과 엘리엇이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동의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아가. 혹시 갖고 싶은 것은 없느냐? 뭐든 말만 하거라. 그게 무엇이든 미라벨 네 생일이 되는 날 선물해 주마.”
크라이튼 대공의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딱히 가지고 싶은 것은 없었다.
이미 내게는 이전의 내가 가질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주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엄마와 가족들까지 곁에 있었다.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욕심이겠지.
하나 생각나는 게 있기는 했다. 훈련하는 동안 내내 생각했던, 실전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허나 이건 크라이튼 대공에게 부탁하기 애매했다. 듀아나 신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거절할 확률이 더 높기도 했다.
결국, 나는 체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어요. 제 생일을 축하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걸요.”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크라이튼 대공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크라이튼 대공의 마음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네 말은 잘 알았다 그럼 언제든 갖고 싶은 것이 생기거든 얘기해 주렴. 알겠느냐?”
크라이튼 대공이 확답을 구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네. 꼭 그럴게요.”
크라이튼 대공은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