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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16)화 (116/174)

116화

“아니. 잘 어울려.”

내가 제프리의 긴 머리를 살피며 말했다. 제프리의 솜씨인지 깔끔하게 잘 묶인 듯했지만, 잔머리가 조금 튀어나온 게 보였다.

“내가 머리 다시 묶어 줄까?”

“응?”

“잔머리가 좀 튀어나온 것 같아서. 싫으면 됐어.”

내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하자 제프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부탁할게.”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낸 제프리가 내게 끈을 넘겼다. 그러고는 내 앞에서 몸을 돌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프리의 머리칼을 쓸었다.

부드러운 은실이 손에서 흩어지는 게 제법 기분이 좋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쓸어 제프리의 머리칼을 한군데로 모았다. 빗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딱히 엉킨 곳이 없어 손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손을 사용해 그의 머리를 쓸 때마다 제프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간지러워?”

“응? 아, 조, 조금?”

어색하게 대답하는 제프리의 말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나니까.”

“알았어.”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내려놓았던 끈으로 천천히 묶기 시작했다.

리본으로 길게 매듭을 지어 놓은 후 나는 천천히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나 봐 봐.”

제프리가 내 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깔끔했다.

“다 됐어.”

“고마워.”

제프리가 조금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키나 덩치는 큰데 수줍은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귀여워서 나는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왜 웃어?”

“아냐, 아무것도.”

대충 얼버무린 후에 나는 다시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근데 머리 길면 전투할 때 안 불편해?”

뒤로 내려 묶어 놓기는 해서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을 테지만, 용병 활동을 하면 당연하게도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중에는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전투 중에 붙잡히게 되면 상황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 부담 때문에 여성 용병들은 머리를 일부러 단발로 치거나 짧게 밀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나 역시 용병 생활을 하며 몇 번이고 자를까 말까 고민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에 제프리가 머리를 기르고 있는 게 조금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제프리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제프리는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은빛 실타래가 손가락 사이를 타고 살랑거리는 게 단순히 보는 입장에서는 예쁘고 부럽기까지 했다.

제프리는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로? 나랑 싸웠던 녀석들 중에서 내 머리칼을 건든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제프리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을 터였다. 실제로 그는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렇고,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그렇고 실력이 대단했다. 어린 나이에 황실의 라이언 기사단만큼이나 이름난 용병단의 단장이 되었으며, 또한 용병들 중에서도 그 정점이라 불리는 용병왕이 되었으니까.

“아, 딱 한 번 있었다.”

“응? 있었어?”

제프리가 불쾌한 기억을 꺼내듯 인상을 찌푸렸다. 의아함에 그를 바라보자 제프리가 기억을 지우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얘긴데, 로만 항구에서 해적 놈한테 한번 걸린 일이 있었어. 그때 머리가 한 뼘은 잘렸었지.”

“정말? 그리고 어떻게 됐어?”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제프리는 용병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저택으로 놀러 오곤 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크게 다친 적은 없는 듯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크게 다쳤던 걸까 싶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뿐이었어. 해적선에 납치될 뻔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탈출했지.”

제프리는 말을 마치며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거기서 많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그 녀석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거든. 감히 날 건들고 멀쩡하게 놔둘 수는 없지.”

의기양양한 그의 모습을 보니 김이 새서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걱정한 건 널 해친 해적이 어떻게 됐는지가 아니라, 너야.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만약에 다치면 꼭 나한테 말해. 내가 치료해 줄 테니까.”

내가 그에게 당부하듯 말하자 제프리가 크게 눈을 떴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드물게 흔들렸다.

“나?”

“그래, 제프리 너.”

일부러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그를 바라보자 제프리가 뒤늦게 웃음을 흘렸다.

“난 괜찮아. 그리고 여기 올 때마다 네가 치료해 주잖아. 다친 곳이 있었어도 벌써 다 치료됐을걸?”

제프리의 말에 나도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만날 때마다 혹시 몰라 신력으로 치료해 주고 있던 참이었다. 만일 내가 모르는 상처나 부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았을 터였다.

“이번에는 수도에 며칠이나 머무를 거야?”

“글쎄. 그건 생각 중이야. 이번에는 좀 길게 머무를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응. 길드에서 독특한 의뢰를 받게 되었거든.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수도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제프리는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프리가 독특하다고 할 정도면 확실히 일반적인 의뢰와는 다른 부류의 의뢰일 터였다.

“무슨 의뢰인데 그래?”

내가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묻자 제프리가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실종 수색 의뢰.”

제프리가 꺼낸 말에 나는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종 수색? 너희 용병단이 그런 의뢰도 받아?”

제프리가 이끄는 용병단은 제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유능한 용병단이었다. 단원 개개인도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제프리가 한 명 한 명 선별한 인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마물 퇴치 의뢰나 국경 지역의 분쟁을 해소하는 데 주로 고용이 되고는 했다.

원래 그의 용병단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용병단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용병이나 용병단은 실종 수색 같은 의뢰는 거의 취급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크라이튼 대공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용병으로 제법 이름이 있었던 나조차도 실종 수색 같은 의뢰는 거의 받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크라이튼 대공이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그를 만나러 온 거였지만.

실종 수색은 일반적으로 의뢰 등급이 낮은 편이었기에 용병 길드에서도 높은 등급의 용병에게는 의뢰가 들어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 걸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제프리가 실종 수색 의뢰를 받았다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원래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길드에서 간곡하게 부탁을 하길래 거절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제프리의 말에 더욱 의문을 느꼈다. 용병 길드에서 의뢰를 거르지 않고 도리어 제프리에게 부탁을 했다니. 내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확히 무슨 의뢰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제프리가 곧장 말을 이었다.

“최근 들어 수도의 부랑자들이 실종되고 있대. 경비대의 출입 기록을 확인해 보면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사람이 증발이라도 된 듯이 없어졌다는 거야. 한두 명도 아니고 그 수가 제법 되나 봐. 그래서 경비대에서 조사해 봤는데 아무런 증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수도에서 사람이 사라졌다면 대체로 두 가지였다. 수도를 떠나 다른 곳에 정착했거나 죽었거나.

그런데 아무리 수색해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수도를 떠났다면 어떻게든 경비대의 출입 기록에 남았을 테고, 죽은 거라면 당연히 시체가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그 모든 증거나 흔적이 남지 않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다수가 그렇게 사라져 버렸으니 용병 길드에서 제프리에게 의뢰를 할 만했다.

“그래서 수도 경비대에서 용병 길드에 의뢰를 했나 봐. 길드에서는 의뢰를 몇 명한테 맡겨도 해결이 되지 않으니 우리 용병단에 부탁을 하게 된 거고. 마침 수도에 온 김에 해 보겠다고 했지.”

제프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제프리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응? 아냐, 아무것도.”

사람이 실종되는 사건이 수도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 사건이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그 대상이 부랑자라고 하니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부랑자라고 하면 실종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힘든 이들이었다. 제프리의 말대로 한두 명 사라진 거였다면 경비대에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데 경비대가 부랑자들의 실종을 알아차릴 정도가 되었다니.

단순히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프리와는 달리 나도 확인을 한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데이는 잘 지내?”

문득 제프리가 데이릭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오늘 신전에서 보았던 데이릭의 모습을 떠올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지. 신전에서 잡일을 맡아서 하고 있어. 한번 찾아가 봐. 보면 반가워할걸?”

“나중에. 시간 남으니 한번 찾아가 보긴 해야지.”

짧게 말한 제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이만 갈게.”

“벌써?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 역시 제프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기가 그렇거든. 그 녀석들 사고라도 치면 곤란하니까.”

제프리가 말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그리고 혹시 괜찮으면 조사 진행되는 거 나한테도 알려 줄 수 있어?”

내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묻자 제프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줄게.”

대답을 마친 제프리는 곧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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