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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14)화 (114/174)
  • 114화

    다니엘에 대한 처분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황제의 앞에서조차 분노를 숨기지 못한 그가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애석하게도 다니엘이 받은 처분은 팔다리의 인대를 끊긴 채 황실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는 것이었다.

    설령 그가 도망치려 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으니 멀리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었다.

    “와, 작은 아가씨 너무 예뻐요!”

    아니타가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했다.

    “그래?”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듀아나 신전에서 제작한 성녀복 제법 내게 잘 어울리는 듯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더 특별하게 꾸며 드릴게요.”

    칼리나는 모처럼 의욕을 내비치며 내게 말했다. 나는 거울을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칼리나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거울 바로 앞 자리였다.

    칼리나는 내 긴 머리를 빗으로 빗어 주었다. 그다음엔 야무진 손길로 내 헤어스타일을 손보기 시작했다.

    “다 됐습니다, 작은 아가씨.”

    한참의 시간이 지나 칼리나가 내게 말했다. 거울 속의 나는 평소와 달리 트윈 포니테일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머리카락이 산들거리는 듯했다.

    “마음에 들어. 고마워, 칼리나.”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작은 아가씨는 어떤 스타일도 잘 어울려서 저도 아가씨를 꾸며 드리는 일이 언제나 즐거워요.”

    칼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거울을 통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벨,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밖에 벌써 신전에서 보낸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고.”

    거울을 보며 칼리나의 솜씨에 감탄하고 있으니 밖에서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시간이 꽤 소모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금방 나갈게.”

    대답을 마치는 사이에 칼리나가 재빨리 다가와 치마를 정돈해 주었다.

    “가자.”

    “예, 작은 아가씨.”

    내가 말하자 칼리나와 아니타가 동시에 대답했다.

    곧 파우더룸을 나오자 등을 돌리고 있던 엘리엇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와, 미라벨 너…….”

    “응?”

    내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리엇이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귀여운 거 같아.”

    “정말?”

    “그래. 어서 가자. 대공 각하와 고모님께도 이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응.”

    엘리엇의 에스코트를 받아 1층으로 내려왔다. 이미 마차 앞에는 가족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어머, 벨!”

    엄마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크라이튼 대공과 브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어떤 모습이어도 귀엽고 사랑스럽구나.”

    크라이튼 대공이 나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크라이튼 대공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했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내가 배시시 웃으며 답하자 크라이튼 대공도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성녀님,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다들 기다리실 거예요.”

    나를 데리러 온 라이넬 사제가 내게 말했다. 그의 옆에 있던 성기사 베트람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게요.”

    나는 대답을 마치고 신전에서 준비해 준 마차에 올라탔다.

    천장이 없는 개방형 마차였다. 마차에는 나만 올라타고,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이 마부를 사이에 두고 마부석에 올랐다.

    가족들은 나와는 달리 바로 뒤에 준비된 대공가의 마차를 타고 따라오기로 되어 있었다.

    몸을 돌려 뒤를 확인해 보니 가족들이 마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성녀님. 위험하니 앞을 봐 주십시오.”

    “응. 알겠어.”

    마부의 조언을 따라 정면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미 성녀가 임명된다는 소식이 수도에 소문으로 퍼진 건지 듀아나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성녀님!”

    “부디 은총을!”

    성녀의 은총을 기원하며 사람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신전에서 하던 것처럼 두 눈을 살포시 내리감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와아!”

    내가 사람들을 향해 기도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썩 싫지는 않았다.

    마차는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지나 듀아나 신전으로 향했다.

    나는 그러는 내내 나를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거나 그들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사람들이 미라벨 널 많이 좋아하는구나.]

    비브르가 옆에서 즐거운 듯이 말했다.

    나는 비브르의 말을 들으며 옅게 웃었다.

    듀아나 신전에 도착하니 사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베트람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플레온 사제가 제일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임명식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플레온 사제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신전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전 깊숙한 곳으로 향하니 사제와 성기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면으로는 바론 대주교과 황제, 황후와 에이드리안이 있었고, 그들의 앞쪽에는 귀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면에 있던 에이드리안은 나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는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오고 싶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황후가 이를 알아차리고 에이드리안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결국, 에이드리안이 실망한 기색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미라벨 크라이튼 성녀님 듭시오.”

    어디선가 내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옆에 있는 플레온 사제를 바라보자 플레온 사제가 내 손을 놓았다.

    “가 보십시오.”

    “네, 알겠어요.”

    나는 짧게 플레온 사제를 향해 대답하고 난 후 곧장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조금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안으로 들어서고 난 후 바론 대주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론 대주교는 기특하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계신 분들께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듀아나 여신의 수호룡 비브르 님의 선택을 받은 성녀님이십니다.”

    바론 대주교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귀족들 사이에서 들리는 듯했다.

    “미라벨 님, 이리 와서 두 손을 내밀어 보시겠습니까?”

    나는 바론 대주교가 시키는 대로 두 손을 바론 대주교를 향해 내밀었다. 그는 내 손에 금속으로 된 나뭇가지를 올려 주었다.

    이게 뭔가 해서 바라보니 바론 대주교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 신력을 불어넣어 보십시오.”

    “네.”

    나뭇가지를 두 손으로 소중히 쥔 채 천천히 신력을 불어넣자 나뭇가지에서 옅은 빛이 났다. 그러더니 나뭇가지에 천천히 꽃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주 신묘한 광경이었다.

    나조차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예쁜 프리지아 꽃이군요.”

    작게 중얼거린 바론 대주교가 고개를 들어 좌중을 훑어보았다.

    “미라벨 님의 신력은 노란 빛깔의 프리지아와 같은 온화함을 갖추고 있군요.”

    “오오.”

    내가 뒤를 돌아 프리지아가 돋아난 가지를 보이자 사람들이 작게 감탄했다. 아무것도 없던 금속 막대에서 꽃을 피워 냈으니 신기하게 보일 터였다. 나 역시 놀랐으니까.

    “성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신력을 갖추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나는 다시 바론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그는 다른 사제에게서 건네받은 망토를 내게 걸쳐 주고는 푸근하게 웃었다.

    “그럼 미라벨 크라이튼 님을 듀아나 신전의 성녀로 임명하겠습니다.”

    바론 대주교의 말이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내 가족들 역시 기쁜 듯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조금은 얼떨떨한 성녀 임명식이었다.

    * * *

    성녀 임명식이 끝나고 귀족들을 만나 축복의 말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가장 먼저 나와 인사를 한 후 계속 있고 싶다며 떼를 쓰다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결국 포기하고 황성으로 돌아갔다.

    “이제 끝입니다.”

    라이넬 사제가 내게 물이 든 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야 한숨 돌리며 라이넬 사제가 건네주는 잔을 받아 입을 축였다.

    “생각보다 힘드네요.”

    “저희가 배려해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절차라고 하니 어쩔 수 없죠. 끝이면 이제 나가도 되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걱정을 담아 말했다.

    “그럼 잠깐 데이릭을 좀 만나도 될까요?”

    “예, 보육원에 있을 겁니다.”

    라이넬 사제의 말을 듣고 곧장 방을 나와 보육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다니엘 문제로 황실에서 조사관이 나오느라 데이릭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주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내심 걸려 나는 곧장 보육원에서 데이릭을 찾았다.

    “데이!”

    의자에 앉아 흙을 발로 차고 있던 데이릭이 내 목소리에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왜 혼자 그러고 있어?”

    “그냥. 아직 낯설어서.”

    “혹시 누가 괴롭히는 건 아니고?”

    “아니야. 진짜 그냥…….”

    말을 마친 데이릭이 내 어깨를 흘끔 쳐다보았다. 정확히 비브르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

    “……보여?”

    조심스럽게 데이릭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데이릭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생각을 좀 해 봤었는데 역시 너였구나. 그때 날 구해 줬던 여자애가.”

    “……응. 그땐 외모가 달라서 못 알아봤지?”

    내가 묻자 데이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제 확실히 알 거 같아. 네가 줬던 그 모습을 바꾸는 마법 도구도 그렇고, 네 어깨 위에 있는 날개 달린 뱀도 그렇고. 네가 날 구해 줬던 걔였다는 거.”

    데이릭은 그때의 기억이 민망한지 어색하게 땅을 찼다.

    “속여서 미안해. 그래도 널 위한 거였어.”

    내가 조심스럽게 사과하자 데이릭이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그러더니 데이릭이 픽 웃음을 흘렸다.

    “사과를 왜 해? 네가 날 구한 거잖아.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넌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지옥을 겪고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을걸?”

    말을 마친 데이릭이 입매를 끌어 천진하게 웃었다.

    “미라벨, 구해 줘서 고마워.”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데이릭을 바라보다가 마주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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