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데이!”
내가 소리를 내어 외치자, 불만 가득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데이릭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구나?”
걸음을 재촉하여 데이릭의 앞에 섰다. 데이릭은 반가워하며 나와 제프리를 맞이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직접 돌아왔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어떻게 데이릭이 납치되던 도중에 사라졌고, 또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사정이 좀 복잡해.”
“괜찮아. 시간 충분하니까. 천천히 얘기해도 돼.”
긴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들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설명을 못 할 수도 있는걸? 내가 아는 부분도 많지 않고.”
“그래도 해 줘. 알고 싶어.”
“으응.”
데이릭은 멋쩍었는지 콧잔등을 긁으며 눈을 깜빡였다.
“제프리랑 같이 납치되던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지게 된 건 알지?”
“응. 알아.”
제프리와 데이릭을 구하러 가던 우리가 데이릭의 실종을 확인하고 얼마나 허탈해 했는지 모른다.
“그때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어.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를 납치한 그자가 나를 보호하고 있더라고.”
“뭐?”
“어떻게 된 건지는 묻지 마. 나도 잘 모르니까.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됐어.”
데이릭은 자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보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데이릭이 악룡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을 납치한 사람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데이릭은 악룡의 힘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그 경우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보호를 받으면서 계속 숨어 있었던 거야?”
“응. 온종일 숨어 다니다가 결국 새벽이 돼서 여관으로 돌아갔는데 제프리가 없더라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듀아나 신전으로 오게 됐어.”
많은 일들이 생략된 듯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데이릭이 신전으로 돌아옴으로 인해 상황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도 구금하고, 데이릭도 신전으로 찾아왔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잘 왔어, 데이. 신전에 있으면 힘들다고 하던데 어때? 아직도 그래?”
“……응.”
데이릭이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악룡의 힘을 타고난 탓에 신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신전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거야?”
“아마도.”
“아마도?”
애매한 데이릭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신전에 있는 게 거북하니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데이릭을 이대로 보냈다가 악룡의 힘을 원하는 다른 사람에게 붙잡히거나 혹은 그가 각성을 해 버린다면 낭패였다.
속으로는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야? 아마도라니.”
“신전에 있으면 아무래도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나는 그제야 데이릭이 망설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일전에 그가 린제이 사제에게 악룡의 힘을 사용하여 도망갔던 그때의 일을 우려하는 듯했다.
“그때는 네가 너무 무서워서 그랬던 게 아닐까?”
내가 그의 마음을 짐작하며 묻자 데이릭이 고개를 들어 나를 주시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순순히 인정하는 데이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을 거야. 그래도 밖에서 널 쫓는 사람들보다는 나을 거니까. 그리고 나도 자주 찾아올게.”
“……응. 알았어.”
데이릭은 평소보다도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여기 꽤 괜찮잖아.”
실제로도 듀아나 신전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은 시설이 괜찮은 축에 속했다.
수도에서 제일 큰 보육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듀아나 신전에서 관리를 잘하는 까닭에 깔끔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신전과 연계되어 직장을 얻을 수도 있었다. 개중에 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들은 사제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데이릭이 사제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근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누구?”
“녈 납치했다가 다시 여기까지 데려왔던 사람.”
“아, 그 사람. 신전 사람들이 데려가더라고. 그 이후는 나도 몰라.”
“그래?”
데이릭과의 대화에서는 대략적인 상황 말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먼발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라이넬 사제를 바라보았다.
라이넬 사제는 내가 용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데이릭을 신전으로 데려온 사람 어디에 있어요?”
“그자라면 신전에서 보호관찰 중입니다. 만나러 가실 건가요?”
라이넬 사제는 당장 나를 안내하려는 듯이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조금 이따가요.”
“알겠습니다.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라이넬 사제가 뒤로 다시 물러났다.
나는 라이넬 사제에게서 시선을 돌려 데이릭을 바라보았다.
“잘 생각했어. 내가 자주 놀러 올 거니까 걱정하진 말고.”
“응.”
데이릭이 멋쩍게 웃었다. 그의 미소 어린 얼굴이 영락없이 열 살 어린애의 그것이라 나도 모르게 함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신전에서 잘만 자라 준다면 데이릭이 악룡을 깨우는 일도, 그리고 악룡의 힘을 각성할 일도 없을 터였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참, 제프리, 이제 넌 가도 되는데 어떻게 할래? 넌 보육원에 있고 싶지는 않다며.”
제프리 역시 보육원에서 지낸다면 좋겠지만, 제프리가 그걸 원치 않으니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여기 억지로 머무르게 한다고 해서 머무를 성격도 아니었고. 단 하루 우리 저택에서 머무는 것조차 실례라고 생각해 새벽에 몰래 빠져나갔던 적도 있었으니까.
“난 가야지.”
“또 가는구나.”
역시나 제프리는 떠날 생각을 마친 것 같았다.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린 제프리는 밝은 목소리로 떠드는 아이들을 한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나를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응. 그래도 나도 자주 여길 찾아올게. 데이가 걱정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미라벨 널 만나러 오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틈틈이 너한테도 찾아갈 거니까.”
“얼마든지. 언제가 됐든 찾아와. 기다릴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지금 떠나려고.”
“벌써?”
준비할 시간도 없이 떠난다고 말하는 제프리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 일이 많아.”
“넌 어리고 아직 용병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할 일이 많아?”
데이릭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프리에게 툴툴거렸다.
“그럴 일이 있어.”
대답을 마친 제프리가 나를 한번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털었다.
“그럼 나는 데이 네가 결정한 것도 봤고, 미라벨도 봤으니까 이만 가 볼게.”
“앞까지 같이 가 줄게.”
“아냐. 혼자 갈래.”
대답을 마친 제프리가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에 봐.”
“응. 잘 가.”
“또 봐.”
제프리는 대답을 마치고 신전 방향으로 가볍게 달려갔다. 그 모습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너도 이제 그만 가 봐. 난 여기 있을 테니까.”
“응. 혹시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알았어.”
나는 데이릭을 뒤로한 채 라이넬 사제에게로 다가갔다.
“라이넬 사제님, 그 사람한테 안내해 주시겠어요? 제가 가서 그 사람에게 새겨진 악룡의 흔적을 지울게요.”
“예, 알겠습니다.”
제프리에게 손 인사를 건넨 후 라이넬 사제를 따라 이동했다.
라이넬 사제가 날 안내한 곳은 지금껏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지하실이었다.
신전에서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었음에도 지하실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하에 마련된 방이었다.
그나마 지하 감옥 같은 곳은 아니었다.
라이넬 사제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이내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안으로 다가가니 잠든 듯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일전에 보았던 양아치 같은 일행과 비슷한 차림새였다.
나는 천천히 그 사람을 확인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의 오른쪽 어깨에 악룡 크립소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데이릭에 의해 지배된 것이었다.
확실히 데이릭의 능력은 다니엘과는 차이가 있었다.
허접하게 상징이 흐트러지던 다니엘의 솜씨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어깨에는 상징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악룡의 힘을 해제할게요.”
“예.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라이넬 사제의 말에 레피드를 소환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남자의 어깨에 꽂아 넣었다.
레피드를 다시 뽑았을 때는 그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악룡의 상징이 없어진 후였다.
나는 황급히 남자에게 신력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상처가 완전히 나았을 즈음,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으아악! 다니엘 님, 봐주십시오!”
고통에 차서 외치는 소리는 잠꼬대와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다니엘의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다니엘…… 제 작은할아버지를 조사할 때 이 사람의 증언이 필요할 거 같아요. 나중에 요청하면 데려와 주시겠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라이넬 사제의 대답을 들은 후 곧장 방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 대회의실로 향했다.
대회의실에는 아까 모였던 인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미 볼일을 마치고 흩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볼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크라이튼 대공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과 대화할 일은 없는 듯했지만, 다들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으니 나 역시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