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브라이언의 공격을 몇 번 버티는 게 전부일 터였다.
그나마도 신력이 월등히 많았기에 버틸 수 있었지, 신력이 아니었으면 이미 브라이언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브라이언과 정면으로 맞붙으려 하면 안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브라이언을 방심하게 만들어 그의 허리에 새겨진 악룡의 상징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일단 악룡의 상징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브라이언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
다른 하나는 불완전하게 지배받는 브라이언을 일깨우는 일이었다.
지금 두 가지 방법 중에서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후자였다.
그는 조금 전에도 엘리엇이 부르는 소리에 크게 동요했다. 단순히 동요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허리춤에 새겨진 악룡의 상징 또한 흐릿하게 일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뭐 하는 게야! 어서 처리하지 않고!”
다니엘이 브라이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브라이언이 다시 나를 향해 검을 세웠다.
다시금 브라이언의 공격을 막을 생각을 하니 등허리에 오한이 스치는 듯했다.
브라이언은 지체하지 않으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거의 감으로만 브라이언의 빠른 공격을 받아치며 브라이언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수, 숙부님. 저예요. 저 미라벨이에요. 숙부님 조카요.”
검을 맞부딪친 채로 감정에 호소했다.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 이제는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게다가 힘이 어찌나 센지 온몸이 울리는 듯했다. 날카로운 금속음 때문에 이제는 귀도 얼얼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제발, 숙부님!”
“브라이언!”
브라이언과 내 사이로 끼어든 것은 크라이튼 대공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대검을 양손에 쥔 채로 브라이언의 검을 받아 내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브라이언, 네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검 내려놓아라.”
크라이튼 대공이 브라이언을 향해 경고했다. 그사이에 엘리엇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괜찮아, 벨?”
“응. 난 괜찮아.”
나는 짧게 엘리엇을 향해 대답한 후 크라이튼 대공을 살폈다.
아무리 크라이튼 대공이라고 하더라도 브라이언을 상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터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버지가 널 공격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대공 각하와 작은할아버님은 대체 왜…….”
“설명하자면 길어. 일단은 숙부님을 정신 차리도록 만들어야 해.”
“뭐?”
설명이 없으니 엘리엇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가볍게 그를 일별한 뒤 숨을 고르며 레피드를 고쳐잡았다.
“지금 숙부님이 작은할아버지에게 조종당하는 중이야.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숙부님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줄래?”
“……알았어.”
엘리엇이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지금 벌어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결국 수긍했다.
“어떻게 하면 돼?”
“나도 모르겠어. 근데 조금 전에 오빠가 숙부님을 불렀을 때, 효과가 있는 것 같았어.”
“그럼 아버지를 부르면 될까?”
“응. 부탁해.”
“알겠어.”
대답을 마친 엘리엇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브라이언을 자세히 살피기 위함인 듯했다.
나 역시 크라이튼 대공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옆으로 이동했다. 엘리엇과는 달리 브라이언의 허리에 새겨진 악룡의 상징이 잘 보이는 왼쪽이었다.
“브라이언!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냐!”
크라이튼 대공이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악룡의 상징이 다시금 흐려졌다가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보아하니 우리가 부를 때 크게 동요하는 듯했다.
“아버지! 지금 실수하고 계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검을 겨눈 상대가 누군지 아세요? 대공 각하예요! 할아버지라고요!”
엘리엇은 내가 부탁한 대로 브라이언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크라이튼 대공도 이쯤 되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거라, 브라이언! 다니엘의 사술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크라이튼 대공이 엄하게 꾸짖듯 브라이언에게 말했다. 브라이언이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반면, 크라이튼 대공은 브라이언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움직여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만일 크라이튼 대공이나 엘리엇이 브라이언을 깨어나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악룡의 상징을 레피드로 부수려는 속셈이었다.
이윽고 브라이언의 근처에 도달했을 때의 일이었다.
“어림없는 짓이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사특한 기운이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내가 황급히 이를 막기 위해 움직였으나 간발의 차이로 레피드가 악룡의 기운을 막아내기 직전에 어둠의 창이 크라이튼 대공의 배에 박혔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힘이 많이 달렸는지 폭발은 없었다.
“할아버지!”
“대공 각하!”
나와 엘리엇이 동시에 소리쳤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는 다급히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다가갔다. 출혈이 꽤 심각했다.
“아, 버지…….”
뒤에서 들려오는 브라이언의 목소리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잠시 레피드를 내려다 놓은 채 떨리는 손으로 크라이튼 대공의 상처 부위에 손을 대었다.
“쿠, 쿨럭! 미, 미라벨, 뒤를 조심…….”
크라이튼 대공은 흐릿하게 뜬 눈으로 내게 경고했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브라이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엘리엇이 빠르게 달려와 내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레피드를 집어 들어 브라이언에게 겨누었다.
엘리엇의 어깨가 떨리는 게 보였다.
“내가 아버지를 막을게. 벨, 넌 빨리 대공 각하를 안전한 곳에 모셔.”
나는 엘리엇의 뒷모습을 살피다 이내 고개를 돌려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했다.
“오빠, 숙부님의 왼쪽 허리춤을 노려. 그 검으로 거길 찌르면, 어쩌면 숙부님도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몰라.”
“…….”
엘리엇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정말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레피드를 사용해서 악룡의 상징을 깨트려도 효과가 있는 걸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여력 역시 없었다. 당장은 크라이튼 대공의 치료가 먼저였다.
나는 곧 신력을 크라이튼 대공에게 집중시켰다.
막대한 양의 신력이 내 의지를 따라 크라이튼 대공에게 흘러 들어갔다.
치료를 위해 이 정도의 신력을 써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라이넬 사제에게 틈틈이 신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 덕에 크라이튼 대공을 치료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환한 빛이 로비를 감싸듯 퍼져나갔다. 온화하고 따뜻한 빛이었다. 마치 봄날의 햇살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빛이 모두 크라이튼 대공에게 흡수되고 난 후에야 천천히 크라이튼 대공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할아버지?”
내가 조심스럽게 불렀으나 크라이튼 대공은 감은 눈을 뜰 줄을 몰랐다.
나는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고 몸을 숙여 크라이튼 대공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치료는 완벽했는데, 혹시 시간이 늦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내 가슴에 불안함을 일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크라이튼 대공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 할아버지는?”
여전히 브라이언과 대치하고 있는 엘리엇이 떨리는 음색으로 내게 물었다.
“괜찮으셔. 잠드신 것 같아.”
“……다행이다.”
엘리엇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엇을 향해 다가갔다.
“여긴 내가 막을게. 넌 빨리…….”
“아니, 내가 해야 해. 검 돌려 줄래?”
“…….”
엘리엇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브라이언은 크라이튼 대공이 크게 다친 이후로 충격받은 얼굴을 한 채 크라이튼 대공을 내려볼 뿐이었다. 그 이상 우리를 공격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머뭇거리다 내게 레피드를 건네주었다.
나는 레피드를 한번 휘두른 후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서 있던 브라이언의 허리춤을 향해 찔러 넣었다.
“크윽…….”
브라이언은 내 공격을 막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덕에 무사히 레피드로 악룡의 상징을 깨부술 수가 있었다.
그의 허리를 찔렀던 레피드를 꺼내며 신력을 사용하여 브라이언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의 머리 위에 또다시 악룡의 기운이 응축되고 있었으나 그 힘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당연한 결과일 것이었다.
아직 다니엘은 완전히 데이릭의 힘을 흡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갖고 있는 악룡의 힘조차도 우리를 위협하는 데 써 버렸으니 점점 고갈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레피드를 든 채로 천천히 다니엘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당황하여 내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도 좀 전에 똑똑히 보았겠지. 내가 그의 힘으로 만든 창을 깨부수는 것을.
그렇다는 것은 지금 그의 머리 위에 응축되는 어둠의 창이 내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 저리 가.”
다니엘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마치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다니엘의 말을 무시하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뒤로 물러나던 다니엘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런 다니엘을 바라보다가 이내 레피드를 휘둘렀다.
내가 노린 것은 다니엘이 아닌,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만들었던 어둠의 창이었다.
이제는 소리도 없이 레피드에 의해 두 동강이 난 어둠의 창이 스산한 기운을 흘리며 허공으로 스러졌다.
그런 후 다니엘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몸에서는 어떤 악룡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끝……인 건가?’
검날을 다니엘의 목에 겨누며 비브르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구나.]
비브르는 내 물음에 긍정을 표해주었다.
“병사들을 데려와!”
엘리엇이 뒤에서 외쳤다. 그러자 전투로 인한 파편들을 피하기 급급했던 하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은 머지않아 대공가의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병사들은 황급히 상황을 정리하고 다니엘을 포박했다.
나는 그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악룡의 힘을 완전히 해방시켜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군림했을 사람의 또 다른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