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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6)화 (106/174)
  • 106화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악룡의 기운이 브라이언에게 흡수된 이후로 브라이언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브르를 향해 물었다.

    다니엘이 브라이언을 향해 악룡의 기운을 뿜기에 당연히 공격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그것과는 조금 궤가 다른 듯했다.

    그때 비브르가 작게 탄식했다.

    [……늦었구나.]

    ‘뭐가 늦은 건데?’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는 비브르를 향해 재차 물었다. 그러자 비브르가 짧게 설명을 이었다.

    [일전에 신전에서 악룡의 힘에 지배되는 자를 봤을 게다. 그렇지 않니?]

    ‘……설마?’

    나도 모르게 헛숨을 집어삼켰다. 내 짐작을 의식한 듯 비브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구나. 하지만 아직 다니엘의 힘으로는 무리일 텐데 어떻게…….]

    이해하지 못한 듯이 비브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서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부서진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편들을 밟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 마침내 1층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아가, 미라벨, 어서 이리 오거라! 다니엘은 브라이언에게 맡기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저지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뇨,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방금도 보셨잖아요.”

    정확히는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다니엘의 창을 깨트린 것은 보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들어가 버린다면 크라이튼 대공은 끝이 날지도 몰랐다.

    그것도 다니엘과 브라이언의 손에 의해서.

    “아가, 제발!”

    내 어깨를 잡고 크라이튼 대공이 애원하듯 말했다. 내가 위험한 길로 가는 것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내가 죽었던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손녀라는 것을 알자마자 나를 보호하려 했다. 그때의 나는 용병으로 제법 이름이 나 있었음에도 많은 병사들 앞에 나서는 내 모습이 많이 애처로워 보인 것 같았다.

    “눈꼴셔서 못 봐 주겠군.”

    다니엘의 목소리가 크라이튼 대공과 나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브라이언이 날 상대할 거라고?”

    말을 마친 다니엘이 브라이언을 돌아보았다.

    “그럴 생각인가, 브라이언?”

    그러고는 브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이 대체 무슨 꿍꿍이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다니엘을 향해 검을 겨눴던 브라이언이 몸을 돌려 우리를 향해 검을 내민 것이었다.

    “브라이언, 뭐 하고 있는 게냐?”

    크라이튼 대공이 훈계하듯 브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대답은 다니엘 쪽에서 나왔다.

    “보다시피 브라이언이 날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이거, 잘못하면 형님이 죽을 수도 있겠는걸?”

    다니엘은 의기양양하여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

    “브라이언!”

    크라이튼 대공이 브라이언을 불렀지만, 브라이언은 대답하는 대신 몇 걸음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황급히 나를 그의 뒤에 숨겼다. 혹시라도 브라이언이 공격하면 자신이 모두 막아 낼 것처럼.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브라이언을 악룡의 힘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기에 나는 발을 움직여 크라이튼 대공의 앞에 섰다.

    “미라벨, 왜 자꾸…….”

    “숙부님을 해방시키려면 제가 해야 해요.”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 제일의 검사이자 기사인 브라이언 크라이튼이었다.

    아직 아홉 살인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겁고 힘든 상대일 것이 분명했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나 있는다면 크라이튼 대공도 죽고, 모두가 파멸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밖에 못 해요. 저만 할 수 있어요.”

    나는 천천히 브라이언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의 몸 어딘가에 악룡의 상징이 새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상징을 레피드로 깨트려야 브라이언을 원래 정신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브라이언의 왼쪽 허리춤 옷 위로 악룡의 상징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린제이 사제와는 달리 완벽한 모양의 문양은 아니었다.

    ‘비브르, 브라이언의 허리에 있는 상징이…….’

    [역시 온전하지 않구나.]

    비브르는 내가 알아차린 것이 기꺼웠는지 바로 내게 대답했다.

    상징이 온전하지 않다는 건 혹시 브라이언이 완전히 악룡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제발 그러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며 브라이언과 대치했다.

    브라이언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검을 든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혼이 나가기라도 한 듯 멍해 보이는 그의 시선이 거슬렸다.

    린제이 사제는 비브르가 눈치채기 전까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브라이언은 어딜 봐도 현저히 이상한 상태였다. 마치 이지를 빼앗긴 인형과도 같아 보였다.

    “숙부님. 정신 차리세요.”

    말로 불러서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으나, 일단은 그를 불렀다.

    다행히도 브라이언은 내 말이 들리긴 하는지 움찔거리며 시선을 내려 나를 주시했다.

    텅 빈 듯한 눈동자가 왠지 무섭게 보였다.

    “숙부님. 저 미라벨이에요.”

    “흥. 웃기는구나, 미라벨. 그렇게 부른다고 브라이언이 널 봐 줄 것 같으냐?”

    다니엘이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좁혔다.

    “내 힘을 깨트릴 수 있는 건 듀아나 신전의 신력을 사용하는 자들뿐이지. 쥐뿔만 한 신력으로 신전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더니, 네가 바로 듀아나 신전의 성녀로구나.”

    다니엘은 확신하듯 중얼거렸다. 이미 내가 성녀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 모양이었다.

    “세드릭과 윌터, 그리고…… 데이릭 모어를 빼돌린 것도 전부 네 짓이지?”

    “잘 알고 계시네요.”

    이미 확신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아니라고 말해 보아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데이릭 모어는 어디 있지? 신전에 있나?”

    “글쎄요. 어디 있을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만일 찾게 되면 저한테도 알려 주시겠어요?”

    실제로 나 역시 데이릭의 소재를 알지 못했기에 꺼낸 말이었으나, 다니엘은 자신을 약 올린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얼굴을 씰룩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맹랑하기는.”

    혀를 짧게 찬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브라이언, 전부 죽여 버려라.”

    다니엘의 명령에 브라이언이 나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고작 그것뿐이었음에도 나는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브라이언을 상대로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내가 과연 브라이언의 검을 몇 합이나 받아 낼 수 있을까?

    평소 훈련 때는 브라이언이 나를 봐주며 검술 상대를 해 주었기에 그가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을 때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마물 토벌대에 올랐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 브라이언이 보여 주었던 신위는 감히 내가 넘어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뒤에는 크라이튼 대공이 있었기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다.

    “숙부님.”

    나는 조심스럽게 브라이언을 불렀다. 검을 쥔 브라이언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게 내 시야에 포착되었다.

    어쩌면, 하는 옅은 기대가 가슴 속에 싹을 틔웠다.

    그때였다.

    “어서 저 맹랑한 꼬마를 처리하지 못해?”

    다니엘이 브라이언을 향해 호통치자 브라이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빠르게 도약하듯 달려와 검을 종으로 휘두르는 브라이언의 행동을 레피드로 간신히 막아 내었다.

    챙!

    일반적인 검과 붙었을 때라면 당연히 검이 레피드의 힘에 의해 갈라져야 맞겠지만, 브라이언의 검은 레피드와 부딪히고도 멀쩡했다.

    나는 얼얼한 팔뚝을 매만질 새도 없이 다시금 검을 휘둘러 오는 브라이언을 막아 내기 위해 레피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윽!”

    한 번 검을 부딪칠 때마다 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훈련 때와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그나마도 검이 레피드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내가 신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니었더라면 나는 단 일 합도 견뎌내지 못한 채로 브라이언의 검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 뻔했다.

    다시 한번 브라이언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대각선 아래에서부터 강하게 쳐올리는 공격이었다.

    간신히 막았으나, 브라이언의 강한 힘을 버티지 못하고 나는 그만 뒤로 구르고 말았다.

    다행히 몸을 재빠르게 굴려 다시 땅에 발을 딛고 중심을 잡았다. 그간의 훈련이 아니었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을 터였다.

    “이게 무슨…….”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엘리엇의 목소리였다.

    나는 아주 잠깐 곁눈질로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엘리엇은 크게 놀란 얼굴로 나와 브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살을 팍 찌푸리며 브라이언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아버지!”

    엘리엇의 외침에 브라이언이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브라이언의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 슬금슬금 뒤로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브라이언의 허리에 새겨진 악룡의 무늬를 확인했다.

    “대체 왜 미라벨에게 검을 겨누시는 겁니까?!”

    엘리엇이 외치자 악룡의 무늬가 옅게 진동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상황을 모두 눈에 새겨넣으며 비브르를 찾았다.

    ‘비브르, 숙부님이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착각일까?’

    [단순히 착각은 아닌 것 같구나.]

    비브르 역시 내 의견에 동의했다.

    [아마도 다니엘의 힘이 완벽하지 않은 탓인 듯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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