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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4)화 (104/174)

104화

“형님, 들어 봐.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와서 내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난……!”

“세드릭과 윌터가 내게 직접 해 준 이야기다.”

다니엘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걸 듣고 있던 크라이튼 대공이 다니엘의 말허리를 끊으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다니엘은 더 변명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할 테지. 편지를 빼돌린 죄로 저택에서 쫓겨난 두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으니. 당사자에게 들은 진상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과연 다니엘에게 더 변명할 거리가 남아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니엘은 다시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외쳤다.

“그자들을 믿어, 형님? 대체 뭘 믿고 나를 의심하는 건데? 봐, 그놈들은 이미 코넬리아의 편지를 훔친 전적이 있는 놈들이야. 그놈들이 돈이 궁하니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고 싶어 내게 누명을 씌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만일 세드릭과 윌터가 지나가는 크라이튼 대공을 붙잡고 읍소한 거라면 다니엘이 말한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을 터였다.

이미 한번 죄를 지어 쫓겨난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한들 죄만 추가될 뿐이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었다.

그러나 크라이튼 대공이 두 사람을 만난 곳은 듀아나 신전이었다. 심지어 그 두 사람은 빈민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듀아나 신전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된 상태였다. 듀아나 신전에서 두 사람을 구출하여 보호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들의 말 쪽에 더 무게를 실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다니엘이 더욱 믿을 만한 증거를 대지 않는 이상에야 크라이튼 대공에게는 다니엘의 말이 변명으로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잘못을 저지른 놈들이야. 두 번은 못 하겠어?”

“끝까지…….”

다니엘의 변명을 듣고 있던 크라이튼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형님!”

“나는 그래도 다니엘, 네가 내 동생이니까…….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형제니까 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그래도 한 번은 널 봐주려 했다.”

“…….”

크라이튼 대공이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크라이튼 대공이 입에 올리는 단어 하나하나에 회한이 얽혀 있었다.

“코넬리아가 내 품으로 돌아왔으니! 이곳으로 오는 내내 너에 대한 배신감을 누르고 또 가라앉히며! 무슨 이유였든 네가 스스로 반성한다면, 한 번의 허물은 감싸 주려 했다.”

“형님…….”

“그런데 넌 끝까지 변명뿐이로구나.”

다니엘은 그제야 변명으로 일관한 자신의 행동이 악수였음을 깨달았는지 주춤거리며 크라이튼 대공에게서 뒤로 물러났다.

“그동안 네가 수상한 자들과 밀회를 즐기는 것도, 대공가에서 지원되는 돈으로 사병을 모으는 걸 알면서도 너를 믿는 마음에 다 넘어가 주었거늘, 그런 결과가 고작 이런 거라니…….”

차갑게 식어버린 목소리에는 더 이상 어떤 기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 됐다. 난 너 같은 동생을 둔 적이 없으니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거라. 오늘부로 내게 동생은 없는 것으로 치겠다. 대공가에서 네게 가는 지원 역시 전부 끊도록 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크라이튼 대공은 말을 마치고 다니엘을 지나쳐 계단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잘못했어!”

크라이튼 대공이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고개를 돌려가며 확인한 다니엘이 손을 뻗어 크라이튼 대공의 한쪽 팔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계단을 향해 오던 크라이튼 대공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나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이 자신을 붙잡았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면에서 보니 다니엘의 얼굴이 불안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만면에 피어 있었다.

연신 아랫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듯한 얼굴을 하던 다니엘이 자리에 양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내가 잘못했어. 형님. 나는 코넬리아 때문에 형님과 황실 사이가 틀어져서 형님이 곤란해졌으니까.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편지만 달랑 보내는 코넬리아가 미워서 그랬어.”

이제는 크라이튼 대공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다니엘이 횡설수설하듯 말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얼굴을 굳히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팔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편지가 전달되지 않으면 언젠가 코넬리아가 형님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맞는 거잖아! 근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시간이 지날수록 멈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지금이 됐다는 거냐?”

다니엘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에는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나는 또다시 다니엘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입만 열면 거짓말뿐이었다.

“맞아.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다니엘은 간절하게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빌었다.

이를 듣고 있던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이 붙잡고 있던 다리를 움직여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실내에는 결국 침묵만이 감돌게 되었다.

“다니엘.”

내내 조용히 다니엘을 내려다보던 크라이튼 대공이 다니엘을 불렀다.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했다.

“할 말은 다 했느냐?”

“……형님.”

다니엘은 작은 목소리로 크라이튼 대공을 불렀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뻔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그런 다니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한 모양이구나. 그럼 이만 가 보거라. 짐은 모두 챙겨서 네 저택으로 따로 보내 주도록 할 테니 지금 당장 떠나거라. 바든도 너의 사람이라고 하니 네게 보내도록 하겠다. 그리고 바라건대 다시는 내 앞으로 찾아오는 일 없으면 좋겠구나.”

말을 마친 크라이튼 대공은 다시금 다니엘을 뒤로하고는 몸을 돌렸다.

크라이튼 대공은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천천히 내가 있는 계단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어깨 너머에서 다니엘을 확인했다. 다니엘은 고개를 숙인 채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쓰러져 좌절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분노를 참아내는 것으로 보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단순히 내 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다니엘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니엘에게서 무겁고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전에도 한 번 느껴 본 적 있는 육중하고 음산한 기운. 그 기운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악룡 크립소의 기운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다니엘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다니엘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브라이언과 바든이었다. 혹시라도 브라이언이 이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리지는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품은 채였다.

그러나 다니엘에게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악룡의 기운을 두 사람은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미라벨, 이곳에 있었느냐? 올라가라고 했는데 가지 않고.”

뒤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크라이튼 대공이 층계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할아버지가 어린 네게 못 볼 꼴을 보였구나.”

크라이튼 대공이 말을 꺼내는 사이에 다니엘의 머리 위로 모이기 시작한 기운은 창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집약되고 응축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브라이언이 고개를 들어 창 쪽을 바라보았다. 브라이언이 기운을 느끼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를 느끼더라도 내가 기운을 선명히 느끼는 것과 달리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라벨!]

이상을 눈치챘는지 어디선가 비브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립소의 기운이다!]

비브르가 내게 외쳤다. 그러나 비브르의 말에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다니엘의 머리 위에 뭉친 사악한 기운의 창이 곧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쏘아진 탓이었다.

“할아버지, 위험해요! 거기서 나오세요!”

나는 다급히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아 뒤로 나뒹굴었다. 크라이튼 대공이 무방비하게 서 있는 통에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크라이튼 대공을 내 쪽으로 끌어올 수는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콰광!

크라이튼 대공과 내가 층계참에서 구르는 사이에 창은 크라이튼 대공이 서 있던 계단에 꽂히며 커다란 소리를 내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크라이튼 대공을 확인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 옆에 넘어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할아버지?”

“으, 아가. 난 괜찮단다. 근데 이게 어떻게 된…….”

넘어진 까닭에 허리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크라이튼 대공은 자신이 서 있던 계단을 확인하고 몸을 굳혔다.

나 역시 계단의 상태를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크라이튼 대공이 있던 자리는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석조로 된 계단은 이리저리 부서져 잔해가 바닥을 뒹굴었고, 먼지가 비산하여 코를 간질였다.

“숙부님! 방금 숙부님께서 하신 겁니까?”

브라이언이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을 뽑을 듯 경계하는 모습으로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그제야 납작 엎드려 있던 자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내가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정확히는 크라이튼 대공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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