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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3)화 (103/174)
  • 103화

    “…….”

    크라이튼 대공은 윌터가 꺼낸 말에 침묵을 유지했다. 아마도 그는 정황을 통해 모든 배후에 다니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방금도 세드릭의 말에서 다니엘이 언급되었으니 못 알아차릴 수가 없을 터였다.

    “다니엘이 왜 내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지?”

    그러나 크라이튼 대공은 다니엘이 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확실히 그동안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의 앞에서 형을 따르는 착한 동생의 모습만 보여 왔기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내가 엄마와 함께 크라이튼 대공가에 돌아오고 난 이후로 보았던 다니엘은 이중적인 모습이 두드러졌다.

    나와 엘리엇의 앞에서는 본색을 드러내는 듯했지만, 크라이튼 대공이나 브라이언, 엄마의 앞에서는 착한 동생이자 인자한 숙부의 모습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래에서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를 접수할 때까지 크라이튼 대공이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내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온전히 크라이튼 대공이 스스로 깨닫고 다니엘의 가식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늘 가장 믿고 의지한 동생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단지 큰아가씨와 작은 아가씨께서 돌아오신 이후에 죄를뒤집어쓴 것이기에……. 자세한 내용은 바든과 다니엘 님에게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윌터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착잡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다가 이내 길고 가는 숨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손에 가려 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그런 크라이튼 대공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런 게 위로가 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 손이 닿은 것을 의식하고 얼굴을 감싼 손을 치웠다.

    그는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녀인 나에게만큼은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가, 아무래도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네.”

    내가 순순히 수긍하고 고래를 끄덕이자 크라이튼 대공이 기특하다며 내 옆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겨 주었다.

    “못 볼 꼴을 보였구나.”

    “아니에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고맙다, 그렇게 말해 줘서.”

    짧게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튼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세드릭과 윌터를 내려다보았다.

    “일단은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모든 것이 확인되거든 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나는 그들이 크라이튼 대공에게 사과하는 사이에 의자에서 일어나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았다.

    크라이튼 대공은 약하게 힘을 주어 내 손을 잡았다가 곧 내가 그를 편하게 잡을 수 있도록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가자, 미라벨.”

    “네, 할아버지.”

    크라이튼 대공과 함께 방을 나섰다. 뒤에서 후회 가득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으나, 크라이튼 대공도 나도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가며 신전의 앞에 도달했다.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신전 계단 앞에서 잠시 하늘을 주시했다.

    나 역시 크라이튼 대공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새파란 하늘이 가슴을 뻥 틔워 주는 느낌이었으나, 크라이튼 대공은 그런 하늘을 보면서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크라이튼 대공의 옆을 지켰다.

    약 오 분 정도가 흐른 후에야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기다렸느냐? 미안하단다. 지루했지?”

    “하늘이 예뻐서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어쩜, 미라벨 넌 나보다도 어른스러울 때가 있구나.”

    작게 웃음을 터트린 크라이튼 대공이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그와 보조를 맞춰 계단을 내려갔다.

    “할아버지가 올려 줄까?”

    “네? 아, 네.”

    막 마차에 오르려는데 크라이튼 대공이 내게 물었다. 아까처럼 도움을 주려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니 크라이튼 대공이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잡더니 순식간에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악!”

    갑작스럽게 높아진 시야에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너무 놀란 모습을 보이자 황급히 마차 위에 나를 올려 주었다.

    “허허, 놀랐다니 미안하구나.”

    “무겁지 않았어요?”

    내가 아직 아홉 살이기는 하지만, 크라이튼 대공은 연세가 많아 노쇠할 것이었다. 걱정스럽게 크라이튼 대공에게 묻자 크라이튼 대공이 대소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할아버지가 이래 봬도 제법 힘이 세단다.”

    크라이튼 대공은 말을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나를 번쩍 들어 올리는 등 평소보다 더 살가운 느낌이라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막상 크라이튼 대공의 얼굴을 마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였다.

    나 때문일까?

    어린 내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괜히 신경 쓰이는 일이 없게 마차에서 조용히 있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크라이튼 대공은 다시금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대공 각하, 도착하였습니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음에도 크라이튼 대공은 소리를 제대로 못 들은 듯했다.

    “할아버지, 도착했대요.”

    “응? 아, 그래. 벌써 도착했구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크라이튼 대공이 마차에서 내렸다. 나도 크라이튼 대공의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렸다.

    “다녀오셨습니까, 대공 각하? 작은 아가씨?”

    하인과 하녀들이 우리를 반겼다.

    크라이튼 대공은 그들을 훑어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다니엘은 돌아왔나?”

    저택에 도착해 꺼낸 첫말은 다니엘을 찾는 것이었다. 크라이튼 대공과 가까이 있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조금 전에 돌아오셨습니다.”

    저택에 이미 다니엘이 있다는 소리에 크라이튼 대공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럼 어서 가서 다니엘과 바든을 이리로 불러오게. 지금 당장.”

    “예, ……예? 현관으로 말입니까?”

    고개를 숙여 대답하던 하인이 크라이튼 대공에게 물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이 안으로 들어가고,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가, 너는 이만 들어가 있거라. 아이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 될 테니.”

    “……네.”

    나는 크라이튼 대공에게 대답한 후 가솔들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방에 숨어서 상황이 모두 지나간 후에 확인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층계참에 잠시 멈추어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층계참에서는 현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대화가 잘 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다니엘과 바든이 현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불렀다고 들었어. 현관으로 나오라니 대체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으면 안에서 하면 될 텐데.”

    현관으로 나오라고 한 것이 영 찜찜했는지 다니엘은 크라이튼 대공을 보자마자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대공 각하. 안에서 말씀 나누세요.”

    브라이언이 다니엘과 함께 있었던 건지 그 역시 뒤늦게 현관으로 나타나 크라이튼 대공에게 제안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말없이 다니엘을 주시하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니엘, 대체 코넬리아의 편지를 빼돌린 이유가 뭐지?”

    “……뭐?”

    다니엘은 크라이튼 대공이 편지와 관련된 질문을 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뒷모습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다니엘의 얼굴이 얼마나 당혹감에 물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든을 이용해서 코넬리아의 편지를 빼돌리고! 그것도 모자라 세드릭과 윌터에게 덮어씌운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크라이튼 대공은 아예 직접적으로 다니엘에게 자신이 알게 된 내용을 언급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굴 시켜서 뭘 했다고?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기에 이러는 거야? 형님, 나 지금 너무 서운해.”

    다니엘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목소리만으로 따지자면 그가 정말 억울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깜빡 속았을 법한 억울함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을 마주하는 크라이튼 대공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왔다. 대체 왜 그랬느냐? 하다못해 코넬리아가 돌아온 그 시점에 내게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를 구했더라면 내가 한 번은 혈육인 너를 용서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느냔 말이야!”

    크라이튼 대공이 다니엘에게 외쳤다. 즉각 아니라고 반박할 줄 알았던 다니엘은 얼어붙기라도 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대공 각하?”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브라이언이 크라이튼 대공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코넬리아가 보낸 편지를 숙부께서 가로채고 있었다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브라이언이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자신을 향하는 두 쌍의 시선을 의식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대체 누구한테 그런 헛소리를 듣고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형님, 완전 헛다리 짚었어. 잘못 안 거라고!”

    다니엘이 헛웃음을 지으며 크라이튼 대공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크라이튼 대공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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