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2)화 (102/174)

102화

마차가 듀아나 신전에 멈추어 섰다. 크라이튼 대공은 나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내게 손을 내밀어 내가 편안히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이리로 오세요, 할아버지.”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선 후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아끌었다.

신전의 사제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익숙한 걸음으로 신전 안으로 들어가 성기사 두 명이 대기하고 있는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크라이튼 대공을 돌아보았다.

“여기예요. 이 안에 세드릭과 윌터가 있어요.”

크라이튼 대공은 착잡한 시선으로 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노크해 드릴까요?”

그때 문 앞을 지키는 성기사 한 명이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크라이튼 대공을 돌아보았다.

나야 상관없었지만, 크라이튼 대공은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크라이튼 대공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예.”

크라이튼 대공의 부탁을 받은 성기사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안에서 윌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기사는 안에서 들려온 소리를 확인하고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에게 짧게 목례하고 크라이튼 대공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대, 대공 각하.”

세드릭이 떨리는 음색으로 크라이튼 대공을 불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크라이튼 대공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음성으로 들렸다.

“정말 미라벨의 말대로 그대들이 여기 있었군, 그래.”

크라이튼 대공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드릭은 고개를 숙인 채 차마 크라이튼 대공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일단 앉으십시오.”

윌터가 눈치 좋게 크라이튼 대공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내가 앉을 자리 역시 준비해 주었다.

크라이튼 대공이 의자에 앉고, 나 역시도 의자에 앉자, 두 사람이 우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놀라는 대신 차분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확인했다.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크라이튼 대공이 세드릭과 윌터를 향해 물었다.

“대공 각하께 사죄를 드리고, 또 말씀을 드릴 일이 있습니다.”

세드릭이 대표로 크라이튼 대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해 보게.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크라이튼 대공은 세드릭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입술을 혀로 축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큰아가씨의 편지를 빼돌린 일, 윌터가 한 일이 아닙니다.”

세드릭은 단도직입적으로 크라이튼 대공에게 윌터의 무고를 고백했다.

이런 말을 할 것을 짐작하고 있던 나조차도 이리 직설적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크라이튼 대공과 세드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라?”

크라이튼 대공은 어서 다음 말을 해 보라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드릭은 초조함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큰아가씨와 작은 아가씨께서 대공가로 복귀하고 난 이후, 집사 바든이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저희에게 거액의 돈을 제시하며 편지를 빼돌린 범인이 되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큰아가씨께서 대공 각하께 꾸준히 사과의 편지를 보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병든 아내가 있었고, 또 윌터의 둘째 아들은 절름발이로 미래가 불투명하였기에 그 달콤하고 무서운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드릭은 윌터를 힐끔 바라본 후 차분하게 자신들이 왜 편지를 빼돌린 범인이 된 건지 설명했다.

말로만 듣자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변명으로 들렸다. 그 때문인지 크라이튼 대공의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던가?”

오히려 낮게 효후하는 듯한 소리로 세드릭과 윌터에게 말했다.

그 음색이 매우 날카롭고 매서워서 세드릭과 윌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라이튼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예?”

멍하니 되묻는 세드릭의 모습에 크라이튼 대공이 이를 바득 갈았다.

“내가 얼마나 만만하면, 감히 그런 짓을 벌일 생각을 한 거지? 난 그래도 가문을 위해 오랜 시간 헌신한 그대들을 용서하고자 죄를 묻지 않고 저택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묻었는데, 자네들은 애초에 내가 자네들을 용서할 줄 알고 나를 기만하는 선택을 했군. 아닌가?”

크라이튼 대공의 서늘한 분노가 방에 내려앉았다.

그제야 세드릭과 윌터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숨기듯 고개를 바닥에 찧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돈에 눈이 멀어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덜덜 떨며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잘못된 선택을 한 건 그들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을 기만하고, 돈을 선택한 자의 말로.

원래대로라면 애초에 편지를 빼돌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귀족을 기만한 죄를 물어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크라이튼 대공이 그들을 용서한 탓에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잘못을 고백하는 건 스스로 목을 다시 조르는 꼴이긴 했다.

크라이튼 대공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길게 숨을 뱉어냈다.

“일단 이야기를 계속해 보지. 왜 자네들이 지금 이 상황에 오게 되었는지. 판단은 모든 것을 듣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

자못 차분해진 음성이었으나, 크라이튼 대공의 분노가 그리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의 눈은 배신감과 불신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예, 예에.”

세드릭은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대공 각하께서 저희를 용서해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든이 제시한 그 돈이 있다면 적어도 내 가족은 평온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세드릭은 바닥에 두었던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곧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대공 각하께서 저희를 용서해 주신 그 날, 저희는 바든이 보낸 사람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끔찍한 학대와 고문을 당했죠. 약속했던 돈은커녕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같이 빌고 또 빌 만큼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신전에서 저희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희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을 겁니다.”

세드릭이 이를 갈며 꺼내는 이야기를 듣던 크라이튼 대공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더니 세드릭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들의 말에는 어폐가 있군. 왜 바든이 굳이 그대들을 납치하여 고문했다는 거지? 바든이 이 모든 일의 배후라면, 차라리 그대들을 죽여 없애는 게 더욱 편했을 텐데.”

고저 없는 목소리로 크라이튼 대공이 세드릭에게 물었다. 세드릭은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이 갇혀 있던 어린아이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아이?”

느닷없이 어린아이 핑계를 대자 크라이튼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세드릭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납작 엎드린 채 말을 이어갔다.

“예! 데이릭 모어라는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면…… 평범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까맣고 음습하며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는데 꼭 악마……. 예, 마치 악마 같았습니다.”

크라이튼 대공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표정을 구겼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똑똑히 새겨들었다.

그들의 말대로 불행 속에 빠진 데이릭은 그때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함께 갇혀 있었던 세드릭의 말은 제법 괜찮은 자료가 되는 셈이었다.

“그 아이가 어둠에 물들면, 다니엘 님께서 지하 감옥으로 찾아오고는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아이의 어둠을 마치 흡수하듯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군, 그래.”

막 세드릭의 말에 집중하려는 찰나에 크라이튼 대공이 코웃음을 치며 세드릭의 말을 끊어버렸다.

이 모든 일이 실제라는 것을 아는 나와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크라이튼 대공에게는 말도 안 되는 공상에 가까운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키며 입을 꾹 닫았다. 어쨌든 나는 이 자리에 안내자로만 온 거지, 세드릭과 윌터를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아마 이 이야기는 듀아나 신전에서 이들을 조사하며 이미 모두 기록했을 터였다.

“그래서 자네들의 변명이 그건가?”

“예?”

그때를 회상하며 턱을 덜덜 떨던 세드릭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크라이튼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저희가 드리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라…….”

“진실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세드릭이 망설이는 사이에 윌터가 용기를 내어 크라이튼 대공에게 소리쳤다.

마침내 크라이튼 대공의 시선이 윌터에게로 향했다. 윌터는 주름진 눈으로 크라이튼 대공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라고 해 봐야 대공 각하께 핑계나 변명으로만 들릴 테죠. 그러니 본론으로 들어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큰아가씨의 편지를 빼돌린 것은 집사 바든입니다. 그리고 그걸 지시한 사람이 바로 대공 각하의 동생인 다니엘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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