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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1)화 (101/174)
  • 101화

    신전에서 나온 나는 곧장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라이넬 사제가 동행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보내준 마차를 타고 여관으로 향하니 말 두 필을 잃고 허망하게 앉아 있는 마부의 모습과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칼리나와 아니타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나와 아니타는 신전의 마차를 확인하고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넬 사제는 마차가 멈추어 서자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마부에게 다가가 다른 사제가 몰고 온 말 두 필을 돌려주며 몇 푼을 더 얹어 주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는 대신 아니타와 칼리나를 마차 안으로 불렀다. 어차피 돌아갈 길이기에 굳이 내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칼리나와 아니타가 마차에 올라타고 난 이후 마차가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라이넬 사제는 멀어지는 마차를 확인하며 우리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비브르, 혹시 그사이에 데이릭이 거기 도착하진 않았어?’

    혹시나 싶은 마음에 돌아가는 길에 비브르에게 물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만일 다니엘 쪽에서 보낸 사람이 데이릭을 데려간 거라면 비브르가 확인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비브르의 목소리는 부정적이었다.

    [아니. 데이릭 모어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구나.]

    ‘아직도?’

    여관에서 다니엘이 있는 공장단지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만일 다니엘이 데이릭을 데려간 거라면 데이릭이 다니엘의 앞에 나타나도 진작에 나타났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비브르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어쩌면 데이릭은 이전에 신전에서 행동했던 것처럼 스스로 도망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주 절망하기에도 이른 상황이었다.

    [그래. 아직까지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 하지만 데이릭 모어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을지는 모르겠구나. 일단은 계속해서 상황을 살피고 변화가 있으면 말해 주마.]

    내가 희망을 품은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비브르는 최악의 상황이 또 하나 있음을 내게 언급했다.

    ‘응. 알았어. 일단은 신전에서 사람을 보내 데이릭을 찾고 있어. 만약 이쪽에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 줄게. 참, 그러고 보니 다니엘은 아직 공장단지에 있는 거지?’

    [그렇다만, 그건 왜 묻느냐?]

    비브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다니엘이 오기 전에 할아버지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게 무엇이냐?]

    ‘엄마의 편지를 빼돌렸다고 거짓말한 이들과 만났어. 그리고 그들이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요청했어. 아마 다니엘이 그 배후에 있었음을 밝히려는 것 같아.’

    [그렇구나. 그럼 다니엘이 어디로 가게 되면 바로 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렴.]

    ‘고마워.’

    비브르와의 대화는 일단 이것으로 마쳤다.

    다행히도 다니엘은 아직 외부에 있는 모양이었다. 가급적이면 크라이튼 대공 역시 저택에 남아 있기를 바라며 나는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차가 이윽고 크라이튼 대공가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하인과 하녀들이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작은 아가씨.”

    “응. 할아버지를 뵙고 싶은데 지금 어디 계셔? 혹시 외출하신 건 아니지?”

    그들의 인사를 받고 우선 크라이튼 대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녀는 빙긋 웃으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대공 각하시라면 서재에 계십니다. 서재로 안내해 드릴까요?”

    “부탁할게.”

    “예, 이리로 오십시오.”

    하녀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라이튼 대공의 서재 앞에 멈추어 선 하녀는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대공 각하, 작은 아가씨께서 드셨습니다.”

    “오오! 들어오라고 해라.”

    문 너머에서 크라이튼 대공이 기꺼워하며 허락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녀가 열어 준 문을 지나 곧 서재에 들어섰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크라이튼 대공이 코에 걸쳐 쓴 안경을 벗어 책상 한쪽에 놓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 오렴, 아가.”

    자리에서 일어난 크라이튼 대공이 서재에 놓인 소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리 오렴. 뭐 마시고 싶은 거라도 있니? 아니면 먹고 싶은 거라도. 이 할아버지에게 말만 하렴. 뭐든지 준비해 줄 테니.”

    크라이튼 대공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나 역시 크라이튼 대공을 따라 소파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니에요. 곧 점심시간이니까 간식은 안 먹어도 돼요.”

    “허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크라이튼 대공이 인자하게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이 할아버지를 찾았니?”

    크라이튼 대공은 내가 단순히 그를 보러 온 게 아니라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크라이튼 대공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깊어 보였다.

    “그게…….”

    본론을 말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다니엘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크라이튼 대공은 동생인 다니엘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가족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되겠지.

    그동안 그의 주변에서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동생 다니엘 크라이튼이라는 것을.

    나는 그 사실을 크라이튼 대공에게 알리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크라이튼 대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뜸을 들이며 한숨을 쉬니?”

    “할아버지, 오늘 제가 듀아나 신전에 갔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났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크라이튼 대공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 얘기해 보렴. 듣고 있단다.”

    “네. 신전에서 만난 건 일전에 엄마의 편지를 빼돌린 일로 저택에서 쫓겨난 세드릭과 윌터였어요.”

    “……세드릭와 윌터? 그 둘을 어쩌다 신전에서 만난 거니?”

    크라이튼 대공은 뜻밖의 인물이 내게서 언급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이 어디 갇혀서 고문을 당하다가 신전 사람들에게 구조받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신전에서 잠시 신세를 지고 있나 봐요.”

    “갇혀? 고문? 미라벨, 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둘이 왜 그런 일을 당한다는 말이냐?”

    내 말에 크라이튼 대공이 미간을 구기며 물어왔다.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꺼낸 말이 너무 황당하여 재확인하고자 함으로 보였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피력했다.

    “말 그대로예요. 두 사람이 누군가한테 감금당하고 고문을 당했다고 해요. 구출되었을 당시에 굉장히 끔찍한 모습이었다고도 하고요. 신전에서 두 사람을 구출하고 신상을 확인하다 보니 크라이튼 대공가가 언급이 되어서 저에게 알려 준 거였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대체 두 사람을 누가 감금하고 고문한단 말이냐?”

    분개한 크라이튼 대공의 목소리는 톤이 낮고 거칠었다. 나는 그런 크라이튼 대공을 빤히 주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모르겠어요. 제가 물어봤는데 대답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더니 할아버지와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제게 부탁했어요. 꼭 만나 뵙고 드릴 얘기가 있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그…… 작은할아버지와 집사 바든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도 했어요.”

    “뭣이?”

    크라이튼 대공은 손을 들어 아랫입술을 검지로 쓸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리고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토대로 상황을 조합해 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가만히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마침내 생각을 마친 크라이튼 대공이 무거운 숨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가. 지금 세드릭과 윌터가 신전에 있는 거니?”

    “네.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부탁하마.”

    크라이튼 대공은 말을 마치고는 설렁줄을 울렸다. 곧 안으로 하인 한 명이 들어와 우리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지금 바로 마차를 대기시키게.”

    “예, 대공 각하.”

    하인이 서재를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마차가 준비되길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크라이튼 대공의 지시를 받고 나갔던 하인이 다시 돌아와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알려 왔다.

    “그럼 가자꾸나.”

    “네, 할아버지.”

    크라이튼 대공의 손을 잡고 서재를 나와 1층 현관으로 향했다. 크라이튼 대공가를 상징하는 인장이 새겨진 깃발이 마차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크라이튼 대공의 도움으로 더욱 편하게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크라이튼 대공이 마차 위로 올라왔다.

    “출발하게.”

    “예, 대공 각하.”

    크라이튼 대공이 출발할 것을 이르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크라이튼 대공은 무언가 생각할 것이 많은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라벨, 다니엘이 움직이는구나.]

    ‘지금?’

    [그래.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저택으로 복귀한다는구나.]

    ‘저택으로 온다고? 그럼 데이릭을 보러 가는 건 아니고?’

    [아직까지는 그렇단다.]

    비브르의 대답을 들으며 짧게 생각에 잠겼다.

    설마 다니엘이 비브르의 존재를 눈치채고 일부러 데이릭을 만나러 가지 않는 건 아니겠지?

    의혹이 들었으나 확인할 바는 없었다.

    만일 다니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움직이는 거라면, 혹시나 했던 것처럼 그는 아직 데이릭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들었다.

    그럼 우리가 더 빨리 데이릭을 찾기만 한다면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을 터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

    [그래. 이따 저택에서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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