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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100)화 (100/174)

100화

제프리와 대화를 마친 후 방에서 나왔다. 제프리는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지낼 방을 안내받기 위해 다른 사제를 따라나섰다.

나는 보육원으로 향하는 제프리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플레온 사제를 따랐다.

플레온 사제가 나를 이끈 곳은 세드릭과 윌터가 있는 곳이었다.

“일단 두 사람은 우연히 신전을 통해 구출되어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플레온 사제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직 저는 모르는 거죠?”

“네. 빈민가에서 구출 당시 성녀님께서 외형을 바꾸는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계셨기 때문에 성녀님이라고 짐작은 못 하는 듯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나는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드릭과 윌터가 나중에 다니엘에게 자신을 구한 것이 나라는 것을 밝히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도 배신을 당했으니 다니엘에게 곧이곧대로 말할까 싶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다니엘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세드릭과 윌터는 그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기에 조심해야 했다.

“신분 확인도 이미 거쳤고,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일하던 집사들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이니 신전에서 성녀님께 두 분에 대한 일을 전달했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당황하겠지만요.”

“알겠어요.”

플레온 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이 머무는 곳은 이곳입니다.”

마침내 세드릭과 윌터가 머무는 방 앞에 도착했다.

신전의 깊숙한 내부에 위치한 방이었는데, 그 앞에는 성기사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성기서 두 명은 플레온 사제와 나를 알아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성기사가 안에 고하고 나자 안에서 희미하게 “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세드릭의 목소리인 듯했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이제 막 점심때가 되어가는 까닭에 안이었음에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세드릭과 윌터는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플레온 사제의 뒤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자, 작은 아가씨?”

“작은 아가씨께서 여긴 어떻게…….”

두 사람은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양 크게 놀라며 말을 더듬거렸다.

“사제님께 두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어.”

나는 심란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때……. 편지 사건 이후로 저택에서 쫓겨난 거 아니었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세드릭과 윌터를 확인하며 물었다.

세드릭과 윌터는 찔리는 바가 있는지 나의 눈을 회피하며 입을 열기를 꺼렸다.

“갑자기 신전에 있다고 해서 놀랐어. 어떻게 된 거야? 얘기해 줘.”

“그, 그것이…….”

“이, 일단 앉아서 말씀을 나누시죠, 작은 아가씨.”

윌터가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는 사이에 세드릭이 나를 향해 권했다.

나에게 앉는 것을 권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도 눈을 자주 깜빡이며 눈동자를 굴리는 게 세드릭 역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계속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 일단은 때문에 세드릭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세드릭과 윌터는 내 앞에 죄인처럼 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의자가 몇 개 놓인 것이 보였다.

“세드릭이랑 윌터도 앉아.”

“저희는 됐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사래까지 치며 극구 부인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팔짱을 끼고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고 있으니까 목이 아파서 그래. 빨리.”

나는 괜히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그제야 세드릭과 윌터가 눈치를 보며 의자를 가져와 내 앞에 앉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나 죄인이오’하는 눈치였다.

“신전에서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던 두 사람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사실이야?”

“…….”

세드릭과 윌터는 내 질문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퍽 불안해 보였다.

그들이 대답이 없다면, 나 역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대답할 때까지 입을 닫고 조용히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안함을 느끼는 건 당연히 세드릭과 윌터였다.

“……예, 사실입니다.”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제야 답답함이 좀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디에, 왜 감금이 되어 있었던 거야?”

“그게.”

그러나 이번 질문만큼은 선뜻 이야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 봐.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이라도 드려 볼게.”

아홉 살짜리 어린애가 이런 말을 한다고 먹힐 리 만무하다는 것쯤은 나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불안이 극에 달한 두 사람이 내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까 하고 바라며 다시 그들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이미 그들은 다니엘을 믿고 크라이튼 대공가를 배신했다가 다니엘에게 역으로 배신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믿어 준 크라이튼 대공을 위해서라도 입을 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다니엘에게 배신당해 감금되고 고문당해야 했던 그 시간 동안, 그리고 듀아나 신전에서 구출되어 치료받는 동안 그들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었을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크라이튼 대공은 편지를 빼돌려 딸과의 만남을 엇갈리게 한 두 사람을 내쫓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는데, 정작 다니엘이 그들을 배신하여 감금하고 고문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은 다니엘을 위해 편지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뒤집어썼음에도 역으로 뒤통수를 맞았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나는 세드릭과 윌터가 그 배신감 때문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번이 기회였다.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얼마나 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까발리기 위한 기회.

그러나 두 사람은 선뜻 말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눈치였다.

“기다려 줄게. 편할 때 얘기해.”

나는 일부러 그들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들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렇게 한참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작은 아가씨.”

마침내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그는 두려움과 용기가 한데 뒤엉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말해.”

“실례가 안 된다면 크라이튼 대공 각하를 뵙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그가 바라는 건 크라이튼 대공과 직접 대화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시치미를 떼며 그에게 되물었다. 세드릭은 결심을 마친 얼굴로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다니엘 님에게는 따로 이 일을 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집사 바든 님에게도요. 대공 각하께 꼭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세드릭에게서 들려온 말은 내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나는 웃음이 지어지려는 것을 최대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오늘 중에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게.”

나는 순순히 세드릭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내내 말이 없던 윌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작은 아가씨께서는 저희가 밉지 않으십니까?”

“뭐?”

윌터는 주름진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회와 한탄과 죄책감이 그의 눈가에 어리고 있었다.

“제가 큰아가씨의 편지를 빼돌려 대공 각하와 큰아가씨의 만남을 방해했다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윌터의 노쇠한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확실히 나는 눈앞의 두 사람이 미웠다.

편지를 훔친 사람이 윌터라서?

아니. 난 애초에 편지를 훔친 자가 다니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윌터와 세드릭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도 나였다.

그러니 편지를 빼돌린 것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들이 자의적으로 누명을 뒤집어써서 다니엘을 감싸 준 것이 미웠던 것이었다.

“미워. 당연히 밉지.”

“역시…… 그렇겠죠.”

기어가듯 작아져 가는 목소리로 윌터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이미 용서하신 일이고, 엄마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두 분이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그러니까 두 사람도 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작은 아가씨…….”

내 말을 모두 경청한 윌터가 마침내 눈물을 쏟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윌터에게 건네주었다.

윌터는 당황한 시선으로 손수건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을 내밀어 정중히 손수건을 받아 갔다.

그러나 윌터는 차마 눈물을 닦지는 못하겠는지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아이처럼 흐느껴 울 뿐이었다.

나는 윌터가 진정할 때까지 방에 남아 있다가 어느 정도 소강이 되었을 즈음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할아버지를 모셔와 볼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니까.”

“예. 작은 아가씨.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드릭이 정중하게 예를 갖춰 내게 인사했다. 나는 그의 인사를 받으며 몸을 돌려 그들의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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