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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7)화 (97/174)

97화

레피드로 인해 잘려 나간 막대의 일부분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나를 공격한 사람이나, 나를 향해 달려오던 사람들이나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멈추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는 상황에 부딪힌 이들의 사고가 정지하며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럴 테지.

그들의 눈에 나는 고작 열 살 남짓한 어린 여자애였다. 그런 내가 검을 들고 설치는 것이 가소롭게 보였을 텐데, 당황스럽게도 쇠로 된 막대를 무 썰 듯 썰어 버렸으니까.

“마, 말도 안 돼.”

잘려 나간 막대를 확인한 남자가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헛숨을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느낄 터였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비브르의 뼈로 만들어진 특수한 검.

일전에도 빈민가에서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자의 검이 레피드로 인해 잘려 나갔으니 내겐 놀랄 일도 아니었다.

레피드가 검보다 강도가 훨씬 높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검을 가볍게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단순히 몸을 풀기 위한 자세였으나, 내 앞에 있던 남자는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뒤로 나자빠졌다.

그들의 무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행히도 그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해 낸 것 같았다.

“으아악!”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인지, 무리 중 한 명이 내게 달려와 롱 소드를 휘두른 것이었다.

나는 자세를 낮춰 남자의 공격을 피한 후 곧장 도약하듯 뛰어올라 검손잡이로 남자의 턱을 쳐올렸다.

그러고는 이어 남자의 팔을 잡은 후 남자의 힘이 풀린 순간에 검을 빼앗았다.

나는 남자의 검을 이용하여 역으로 그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남자는 목 끝에 닿는 칼날에 헛숨을 들이쉬더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브라이언의 훈련을 받으며 간신히 평기사와 겨루는 수준이었지만, 기사조차도 되지 못하는 한량에게 질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용병으로 지내며 축적된 경험과 브라이언에게서 배운 기사로서의 훈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허술한 공격은 나조차도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다.

나는 남자의 검을 든 채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사이 주변을 감싸고 있던 무리들이 천천히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베트람은 마침내 나와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마저 제압했다.

그제야 나는 들고 있던 롱 소드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 수상한 통을 확인해 보았다.

통을 감싼 밧줄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내 나약한 손으로는 풀리지도 않았다. 결국 레피드를 사용해 밧줄을 끊어낸 후에야 통의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제프리!”

그 통 안에는 제프리가 있었다.

“눕히는 게 좋겠습니다.”

“네.”

베트람의 도움을 받아 제프리를 통에서 꺼내 바닥에 눕혔다. 제프리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미동도 없는 것 같아 걱정이었으나, 그의 상체가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오르내리고 있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데이릭 모어가 없군요.”

베트람이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네.”

정신을 잃은 제프리를 앞에 두고 할 말을 아닌 듯했지만, 어쨌든 통 안에 데이릭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프리를 구한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었지만, 데이릭을 놓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쪽이 미끼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데이릭이 탈출한 것일 수도 있죠.”

베트람의 말처럼 제프리를 미끼로 사용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프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거나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물론 다니엘 쪽에서 이미 이를 짐작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외에 또다른 가능성을 하나 열어 두고 있었다.

데이릭은 악룡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붙잡힌 시점에서 어떻게든 악룡의 힘을 사용해 도망칠 계략을 세우지 않았을까?

린제이 사제를 악룡의 힘으로 지배한 것처럼, 악룡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했든 뭘했든 스스로 도망쳤을 가능성 역시 열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아이를 치료하겠습니다.”

라이넬 사제가 제프리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라이넬 사제를 보며 옅게 웃었다.

“부탁드릴게요.”

곧 라이넬 사제가 제프리를 향해 신력을 사용했다.

하얀빛이 제프리의 주변에 모여들더니 천천히 그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프리의 몸에 나 있던 자잘한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으으.”

빛이 모두 제프리에게 흡수되고 난 후에야 제프리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제프리, 정신이 들어?”

나는 무릎을 굽혀 앉아 제프리의 상태를 살폈다. 라이넬 사제의 신력으로 인해 회복한 제프리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몇 번 깜빡인 후에야 똑바로 눈을 떴다.

“미라벨? 여기가 어디야?”

가라앉은 음색으로 묻던 제프리가 순간 상체를 일으켰다.

“데이는?”

제프리는 데이릭을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데이릭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데이는 못 찾았어. 제프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래도 아무런 상황을 모르는 우리보다는 제프리가 더욱 상황을 자세히 알 것 같았기에 나는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제프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미라벨 네가 신전으로 떠나고 난 후에 데이랑 나는 널 기다리는 중이었어. 그런데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리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미라벨 네가 데려온 것 같지는 않아서 문을 열지 않고 없는 척을 하고 있었더니 그 자식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어.”

제프리는 다시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감싸며 말했다.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제프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연스럽게 제프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때 찾아온 자들이 저자들이야?”

나는 우리의 뒤편에 베트람이 제압해 놓은 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프리가 그자들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저놈들이야. 그나저나…… 그사이에 다 정리해 놨구나. 꽤 버겁던데.”

“응. 기사 베트람이 처리해 주셨어.”

제프리는 내 말에 베트람을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만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베트람은 그런 제프리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팔찌는 어떻게 된 거고.”

내가 재촉하자 제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데이를 찾더라고. 데이의 본명이 데이릭 모어래.”

“……으응.”

“알고 있었어?”

제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신전에서도 데이를 찾고 있었다고. 그래서 알게 됐어.”

거짓말이면서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내가 데이릭에 대해서 안 건 그보다 더 앞의 일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신전에서 데이릭을 찾으며 알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렇구나. 어쨌든 팔찌를 차고 있어서 정체를 들키지 않았는데, 그 자식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어. 데이의 행방을 불라면서. 아마 내가 어제 데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들어가는 걸 누군가 본 모양이야. 데이가 너무 겁을 먹고 있어서 내가 데이를 지키려고 했는데 저 자식들이 다수라서 이기기 힘들더라고.”

제프리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궁지에 몰렸는데 데이가 팔찌를 벗었어. 날 지키려고.”

“…….”

그래서 바닥에 팔찌가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뒤는 생각이 안 나. 머리를 맞았는데 아마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정신을 잃은 것 같아. 깨어나 보니 지금이고.”

제프리의 말을 종합해 들으면 데이릭은 제프리를 지키기 위해 제 발로 다니엘의 하수인에게 붙잡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짧은 사이에 사라져 있었다.

제프리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기에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더 물어보았자 괜히 힘들어 할까 겁이 나 일단은 제프리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 두었다.

“알았어. 말해 줘서 고마워, 제프리. 일단 좀 쉬어.”

“…….”

내 말에 제프리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였으나 딱히 휴식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어떡하죠?”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에게 물었다.

“글쎄요. 데이릭 모어가 능력을 사용하여 도망간 건지, 아니면 다른 길로 그자에게 보내졌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할 바가 없군요.”

결국 원점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전에서는 사람을 풀어서 데이릭의 소재를 알아봐 주세요. 저는 비브르를 통해서 데이릭이 그자에게 끌려간 건지 확인을 해 볼게요.”

“예. 일단은 그러는 수밖에 없겠군요.”

라이넬 사제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베트람 역시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갈까요?”

“예. 그런데 일단 저는 이자들을 처리해야 할 테니 먼저 돌아가십시오.”

베트람이 바닥에 널브러진 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이대로 두었다가 그들이 다니엘에게로 돌아가면 곤란했기에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네. 그럼 우선 저희가 돌아가서 신전에 부탁해 사람을 보낼게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일단 베트람을 놔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빤히 주시하고 있던 제프리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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