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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6)화 (96/174)
  • 96화

    나는 베트람이 내민 손을 잡았다. 베트람은 내게 뻗은 손에 힘을 주더니 나를 말 위에 올려 주었다.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말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작은 아가씨!”

    마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리나와 아니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음을 지었다.

    “금방 다녀올게. 여기 기다리고 있어.”

    “예?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혹시 제프리가 돌아오지는 않는지 기다려 줘. 성기사님과 함께 가니 위험하지 않을 거야.”

    칼리나와 아니타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으나, 사실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두 사람을 달고 갈 여유가 없었다.

    칼리나가 위험하다며 나를 말리기 위해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시면 대공 각하께 크게 혼이 날 겁니다!”

    칼리나가 나를 막아 세우기 위해 말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겁을 집어먹을 어린이가 아니었다.

    “미안해. 금방 다녀올게.”

    말을 마친 나는 곧장 옆을 돌아보았다. 라이넬 사제도 베트람이 고삐를 끊어놓은 말 위에 올라타 끊어진 고삐를 꼭 틀어쥔 상태였다.

    이대로 바로 출발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여관 주인이 말한 곳으로 달리겠습니다. 그 사이에 미라벨님은 위치를 파악해 주십시오.”

    “네, 부탁해요.”

    “예. 핫!”

    베트람이 말의 옆구리를 차자 곧 말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칼리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들리지 않는 척 앞을 주시하며 멀리 있을 비브르를 향해 정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비브르! 비브르! 내 목소리 들려?’

    [그래. 들린단다. 왜 그러느냐? 그렇게 급하게 나를 부르고…….]

    내가 소리치듯 부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비브르가 내게 물었다.

    바로 대화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데이릭 모어를 놓쳤어. 다니엘이 보낸 이들이 그를 납치한 것 같아. 그래서 그런데 지금 다니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최대한 간략하게 비브르에게 설명했다. 비브르는 내 설명을 들으며 짧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보다 더 빠른 일이야……. 일단 이곳은 다니엘의 공장이란다. 네가 사는 그 저택으로부터 남동쪽 방향이고, 성벽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단다.]

    ‘남동쪽?’

    비브르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브르가 꺼낸 위치는 저택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더 자세한 방향을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은 수도의 동쪽 게이트 근처였다. 비브르의 말대로라면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했다.

    다행히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게 길잡이가 되지는 않았다.

    ‘더 자세히 알려 줄 수는 없어? 그곳으로 가면서 근처에 뭐가 있었어?’

    [음.]

    비브르가 고민하는 그 짧은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빨리! 이러다가 데이릭을 놓치면 데이릭이 다니엘의 앞에 끌려가고 난 다음에 도착하게 될 거야.’

    [알겠다. 남동쪽으로 오게 되면 공장단지가 있을 거란다. 그리고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커다란 관문 같은 곳을 지나게 되어 있는데 그곳에 아주 커다란 전나무가 하나 있단다.]

    ‘전나무?’

    비브르의 말에 힌트를 얻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물건 운송에 대한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공장을 지키듯 선 거대한 전나무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알겠어. 고마워.’

    [아니다. 부디 여신님의 은총이 있길 기원하마.]

    “여기서부터는 남서쪽으로 이동해 주세요! 그자에게 가는 거라면 커다란 전나무 앞을 지나치게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베트람은 말고삐를 움켜쥐며 대답했다.

    부디 제프리와 데이릭을 데려간 자들이 다니엘에게 도착하기 전에, 아니, 그들이 공장단지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막아 세워야 했다.

    “저기 저자들인 듯합니다.”

    한창 달리고 있으니 베트람이 나직이 내게 속삭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련의 무리가 바퀴 달린 커다란 통을 이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베트람은 말의 속도를 더욱 올려 그들을 추월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말의 속도로 인해 그들이 당황하며 옆으로 물러서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말 똑바로 몰아!”

    그들 중 한 명이 우리를 향해 외쳤다.

    그들이 화를 내건 말건 우리는 그들을 추월한 후로 속도를 늦추었다. 그 모양새가 꼭 그들의 욕을 듣고 멈추어 선 모양새였다.

    “뭐야? 지들이 말을 험하게 몰아 놓은 주제에……. 내가 한 소리가 꼬와서 견딜 수가 없든?”

    멀리서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베트람은 말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그들에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들에게로 말을 몰았다. 말이 다그닥거리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허?”

    그들은 마침내 이상한 점을 깨닫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이상한 조합이군. 듀아나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 그리고 꼬맹이라니.”

    다 들릴 정도로 중얼거린 남자가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비로우신 듀아나 신전의 사제님과 성기사님께서 우리가 한 말에 화가 나셨나?”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리며 우리에게 물었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앞을 막았습니다.”

    “확인?”

    의아한 듯이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남자의 주변에 있던 다른 자들 역시 와하하 크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게 뭔지 들어나 보지.”

    말해 보라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남자의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베트람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바퀴 달린 통에 든 것을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뭐라고?”

    베트람의 말에 남자는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웠다.

    “뭘 어쩌고 어째?”

    “그 통에 든 것을 확인하고 싶다 말했습니다. 제가 찾는 사람이 그 안에 있는지, 없는지.”

    베트람이 지지 않고 대꾸하자 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보여 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이봐, 성기사 씨. 쓸데없이 시비 털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확인해야 한다고.”

    “싫다면?”

    남자가 비꼬듯 물었다. 베트람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강제로 확인할 수밖에요. 저희도 시간이 없어서.”

    베트람은 순식간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의 덩치가 꽤 컸음에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나는 그런 베트람의 가볍고 날랜 자세에 놀라며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나도 베트람처럼 말을 다루는 데 익숙하면 좋겠지만, 내가 너무 어리고 몸이 작아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라이넬 사제와 같이 뒤에서 쉬고 계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런 자들이라면 저로도 충분합니다.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실 수 있습니다.”

    베트람이 나를 확인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친구가 잡혀 있잖아요.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테니까요.”

    “……예.”

    베트람이 나를 허용해 주었다. 곧 그의 옆에 내가 서자, 남자가 커다랗게 폭소했다.

    우하하. 큰 소리로 웃어 대는 꼴이 나나 베트람을 얕보는 모양이었다.

    나를 얕보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트람을 얕보는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베트람은 성녀인 날 보호하는 자리에 배치할 정도로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

    데이릭을 구하던 빈민가에서 실질적으로 모든 방해꾼들을 제거한 사람이 바로 베트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베트람만큼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습네. 고작 성기사 한 명과 어린애가 우리를 막아서고 있다니. 우리가 원래 이런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상대해 주도록 하지.”

    말을 마치며 남자가 허리춤에 매여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있는 자들도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베트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남자 쪽이었다. 그는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베트람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 들어 갔다.

    베트람은 가볍게 그의 검을 피하며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자의 뺨을 주먹으로 쳐올렸다. 남자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며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연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이를 뿌득 갈아댔다. 그러고는 주변에 있는 그의 동료들을 확인한 후 베트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다들 쳐라!”

    “예!”

    남자의 말을 시작으로 남자의 무리 대부분이 베트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사이에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레피드를 소환해 냈다.

    “무슨!”

    “마법 검인가?”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검을 확인한 이들이 당황스러움에 외쳤다.

    “그래 보았자 어린애야! 저 애를 잡으면 저 성기사를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내가 뻔히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물론 내가 든 검이 평범한 검이었다면, 나는 그들의 외침에 지레 겁을 먹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을 터였다.

    내 물리적인 힘이 아직은 간신히 평기사들과 합을 맞추는 정도에 불과했기에 선뜻 나를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막아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든 검이 얼마나 뛰어난 무기인지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흐압!”

    무리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쇠로 된 막대기를 휘둘렀다.

    어찌나 무식하게 휘두르는지 한 번 맞으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묵직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몸을 낮추어 막대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레피드를 들어 막대를 향해 휘둘렀다.

    깡!

    레피드가 순간 막대에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를 내었다. 단지 그것뿐임에도 레피드의 칼날은 막대에 반절이나 꽂혀 있었다.

    내가 조금 더 힘을 주자, 레피드가 그대로 막대를 잘라 내었다. 마치 종이를 베듯 서걱거리는 느낌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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