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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5)화 (95/174)

95화

“하지만 성녀님, 아무리 그래도 데이릭 모어는 악룡의 씨앗인 자인데 라이넬 사제만 동행하는 건 조금 무리인 듯싶습니다.”

내가 라이넬 사제와 동행하여 데이릭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바론 대주교가 우려를 표했다.

“만일에 데이릭 모어가 악룡의 힘을 사용한다면 라이넬 사제가 그를 막기 어려울 겁니다. 물론 라이넬 사제는 신력을 섬세하게 조절하여 치료에 능통합니다만, 애석하게도 공격에는 취약한 편입니다. 성녀님께서 검을 다루시기는 하나, 아직 성녀님의 신체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겠지요.”

바론 대주교는 나와 라이넬 사제 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라이넬 사제는 기사가 아니었고, 또한 나는 아직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데이릭과 직접 만나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위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고작 이틀 전에 악룡의 힘을 사용해 린제이 사제를 지배했고, 그것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었다.

그러니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를 엄호할 성기사 한 명을 같이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녀님과 라이넬 사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성기사 한 명과는 동행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론 대주교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그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이해했어요. 그럼 일전에 같이 다닌 적이 있는 성기사 베트람에게 엄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한번 같이 다녀 본 사람과 다니는 게 더욱 편할 것 같아서요.”

“예, 알겠습니다. 기사 베트람을 호출하도록 하지요. 에밀 사제님, 기사 베트람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예, 대주교님.”

바론 대주교가 에밀 사제에게 부탁하자, 곧 에밀 사제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회의실 문이 열리고 에밀 사제와 베트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주교님.”

베트람이 바론 대주교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사 베트람, 오늘 성녀님께서 데이릭 모어를 이곳으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라이넬 사제와 동행하기로 되어 있으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대가 성녀님과 라이넬 사제의 엄호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바론 대주교가 상황을 짧게 설명하며 베트람에게 부탁했다. 베트람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다행히도 베트람은 흔쾌히 긍정을 표했다.

“좋아요. 그럼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바로 갔으면 해요. 혹시나 데이릭이 마음을 바꾼다면 곤란할 테니까요.”

베트람도 동의했겠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 그들을 재촉했다.

“예, 성녀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데이릭 모어를 이곳 신전으로 무사히 데리고 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바론 대주교는 우리를 향해 여신님의 은총을 빌어 주었다. 나나 라이넬 사제, 그리고 성기사 베트람 또한 바론 대주교를 향해 인사를 마친 후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을 대동한 채 신전을 빠르게 벗어났다.

내가 신전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신전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자리가 모자란 탓에 라이넬 사제는 우리와 함께 안에 탔고, 베트람은 마부석에 마부와 함께 올라탔다.

우리가 모두 올라타 마차 문을 닫은 후에야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참 달린 끝에 마차는 마침내 제프리와 데이릭이 머무는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후 곧장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3층으로 올라갈 계획이었지만, 여관 1층 내부를 확인한 후 우리는 선뜻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라이넬 사제가 엉망이 된 여관 내부를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황당함을 담은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여관 1층은 간단한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여관 내부의 테이블과 의자가 부서져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패싸움이라도 난 듯했다.

처음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던 여관 주인장 역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에 멍을 단 채 식당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이넬 사제가 주인장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주인장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곧 라이넬 사제가 입고 있는 듀아나 신전의 사제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넬 사제는 그런 주인장에게 신력을 불어넣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인장의 얼굴을 치료해 준 라이넬 사제가 다시금 그를 향해 물었다.

주인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상한 무리가 여관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더니 식탁과 의자를 부수며 저를 위협했습니다.”

“뭐라고 위협을 하던가요?”

여관이 어떤 경위로 엉망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라이넬 사제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주인장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그러자 주인장이 떠듬떠듬 자신이 아는 것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이곳에 어떤 꼬맹이가 묵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그 꼬맹이가 또 다른 꼬맹이를 데려왔는데 그 꼬맹이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벌이지 뭡니까.”

억울함이 담긴 주인장의 말에 라이넬 사제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맞닿았다. 불길함이 가슴을 불규칙적으로 뛰게 만들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뒤를 베트람과 라이넬 사제가 뒤따랐다.

빠르게 3층으로 올라가 제프리와 데이릭이 머무는 방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머무는 방 앞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부서진 문의 잔해가 복도에 비산해 있었으며, 거뭇한 발자국이 이곳저곳에 찍혀 있었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방 안을 확인했다.

“제프리! 데이!”

이 방에 남아 있을 두 사람을 걱정해서 불렀지만, 내가 방 안을 확인했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엉망이 되어 버린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제프리와 데이릭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은 채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방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바닥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을 해 보니 그것은 내가 데이릭에게 주었던 팔찌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팔찌를 주워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다니엘 쪽의 사람들이 데이릭을 쫓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들이 데이릭을 이렇게 빨리 찾아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팔찌.

데이릭은 내가 건네주었던 팔찌로 모습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 팔찌가 엉망이 된 방에 남아 있다는 말인가.

머리가 천천히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제프리와 데이릭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방으로 들어와 내부의 흔적을 확인하는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을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올라왔던 계단을 그대로 내려갔다.

“같이 가십시오!”

뒤에서 뒤늦게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이 나를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나를 멈추지는 못했다.

나는 곧바로 1층으로 내려와 부서진 것들을 정리하는 여관 주인장에게로 다가갔다.

“3층에 머물던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지?”

“뭐요?”

내가 다짜고짜 제프리와 데이릭의 행방을 묻자 주인장이 한쪽 눈썹을 불쾌하게 일그러트렸다.

“3층에 머물던 내 또래의 아이들. 아까 그 패거리가 와서 그 아이들을 데려간 거야?”

주인장은 나를 내려 보다가 이내 내 주변 사람들을 확인한 후에야 조금은 공손해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도축장으로 가축을 끌고 가듯이 질질 끌고 가더군요”

“방향은?”

“방향은…… 저도 모릅지요. 제가 아는 건 이곳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향했다는 것뿐입니다.”

주인장은 난감해 하는 얼굴로 나와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제프리와 데이릭을 데려간 무리에 대한 흔적을 더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금 주인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간은 얼마나 오래되었지?”

“아마 십 분은 넘었을 거요.”

십 분.

그렇게 오래된 시간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을 확인했다.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베트람이 먼저 나와 라이넬 사제를 향해 물었다.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방향을 모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그들이 움직인 경로가 여관으로부터 우측이라는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한 블록만 지나도 길은 수 개의 갈래로 나뉘게 되어 있었다.

그나마 지금 생각해 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처음 데이릭을 발견한 빈민가였지만, 그들이 그곳으로 갔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자에게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라이넬 사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말을 꺼낸 ‘그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다니엘 크라이튼.

“그자가 있는 위치라면 비브르에게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베트람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이내 여관 바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라이넬 사제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베트람은 여관 바깥으로 나와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검을 꺼내어 마차와 연결된 고삐를 단숨에 끊어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작스러운 베트람의 행동에 마부가 화들짝 놀라며 베트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베트람은 그런 마부에게 사과하는 대신 주머니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잠시 빌리겠습니다.”

“예?”

당황해하는 마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베트람은 곧장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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