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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4)화 (94/174)
  • 94화

    데이릭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바뀐 얼굴은 이리저리 돌려 가며 확인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야.”

    데이릭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말은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다른 방법이 생길 때까지만 빌려주는 거야. 나도 네가 필요하다면 다시 돌려받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건 내 물건이 아니라서 내 마음대로 줄 수는 없어.”

    “역시 그렇지?”

    내 말을 듣고 되묻는 데이릭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근데 보니까 데이, 널 찾는 사람들이 더 있는 거 같은데,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데이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듀아나 신전 사람들이지?”

    “맞아.”

    빙빙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이미 밖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을 알았다고 이야기했으므로 그 대상이 또 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는 무슨 일이야? 듀아나 신전에서 널 학대할 리는 없을 텐데.”

    “그렇기는 해. 심지어 날 그곳에서 탈출시켜 주기까지 했는걸.”

    마침내 데이릭의 입에서 듀아나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신전 사람들이 날 지하실에서 구해서 신전 보육원으로 데려갔어.”

    “근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건데? 보육원에 들어갔으면 거기 있어야지.”

    “…….”

    제프리의 물음에도 데이릭은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보다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욱 꺼리는 듯이 보였다.

    제프리는 혹시나 하는 기색으로 데이릭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들도 널 때렸어?”

    “아니! 그건 아니야.”

    다행히도 데이릭은 제프리의 물음을 강하게 부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는 듀아나 신전의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데이릭을 담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플레온 사제였다. 아무리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라고는 해도 데이릭에게 못되게 굴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거기 있으면 이상하게 답답하고 숨이 막혔어. 마치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거기서는 직접 도망 나왔어.”

    “도망 나왔으면 끝나는 거지 왜 널 쫓아? 그건 좀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널 찾아서 도와주려는 거 아닐까?”

    제프리가 의문을 제기했다. 타당한 의문이었으나, 데이릭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아닐 거야……. 내가 거기 있는 사람한테 나쁜 짓을 했거든.”

    “나쁜 짓이라는 건…… 공격했다는 뜻이야?”

    “……응.”

    “…….”

    제프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데이릭을 바라보았다.

    “그럼 너는 널 구해 준 사람들을 공격하고 튀었다는 말이야?”

    제프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런 상황을 모르는 제프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데이릭이 신전을 탈출한 이유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기 때문인지 그는 신전에 있는 동안 거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건 내가 일전에 저택에서 다니엘의 힘을 감지하며 느꼈던 그 육중한 압박감과 숨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기운과도 같은 것일 터였다.

    내가 악룡의 기운을 느낄 때 느꼈던 것처럼, 데이릭 역시 신력을 느낄 때 그런 느낌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데이릭이 신전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너 진짜 못됐구나.”

    “…….”

    데이릭은 제프리의 말에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만해, 제프리. 데이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

    “사정? 어느 사정이 있어서 자신을 도와 준 사람을 공격한단 말이야?”

    나는 언성을 높이는 제프리를 보며 설핏 웃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제프리와 제프리가 이끄는 용병대의 의리만큼은 유명했다.

    게다가 그는 이번 생에서도 고작 감자 몇 알을 베풀어 준 내게 은혜를 갚겠다고 나섰다.

    그런 그에게 데이릭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어차피 내가 신전 사람들과 안면이 있으니까 그 일은 내가 따로 알아볼게. 정말 데이가 사람을 공격한 건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잖아. 지금 데이도 반성하는 얼굴이고.”

    “흥.”

    내 말에 제프리가 콧방귀를 뀌며 데이릭을 외면했다.

    “그래서 데이. 모든 얘기를 종합해 봤는데, 네가 보육원에 있는 게 힘들었다고는 해도 몸을 의탁하기에는 신전 보육원이 좋지 않을까 싶어. 꼭 거기서 지내지는 않아도 되잖아. 그쪽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가는 방법도 있고.”

    “…….”

    내 제안에도 데이릭은 대답이 없었다. 갈등하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망설임이 더 큰 것 같았다.

    “적어도 널 쫓는 그 학대범들이랑은 다를 거야. 게다가 나는 신전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 틈틈이 내가 살펴 줄 수 있으니까 혹시나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겠지?”

    무슨 말인지 데이릭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데이릭과 눈을 맞추고 다시 말할 것을 종용했다.

    “사과해야겠지?”

    데이릭이 고민 끝에 꺼낸 말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분명 사람들도 널 이해해 줄 거야.”

    “그럼 그렇게 할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이 있다면 꼭 사과하고 싶어.”

    데이릭 나름의 용기였다. 나는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또 사과하려 마음을 먹은 데이릭의 모습이 기특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 신전으로 갈래?”

    “아니, 그건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

    데이릭의 말대로 조금의 준비시간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데이릭이 말을 바꿀 수 있기에 나는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럼 내가 신전에서 아는 사람을 데려올게. 그분과 함께 들어가면 그래도 괜찮을 거야.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응.”

    데이릭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나는 데이릭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여전히 꽁해 있는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제프리, 들었지? 사과한대.”

    “나도 들었어.”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제프리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내가 이 배은망덕한 자식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도망 못 가게 잡아 둘게.”

    심술 궂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제프리의 모습에 데이릭이 울상을 지었다.

    “그럼 다녀올게.”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리나와 아니타가 나를 반겼다.

    “신전으로 가자.”

    칼리나와 아니타가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칼리나는 근처에서 쉬고 있던 영업용 마차를 불러왔다. 듀아나 신전이 이곳에서 먼 까닭에 걸어서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차를 타고 빠르게 신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니 인파 사이로 데이릭을 찾는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것이 보였다. 데이릭의 행방을 묻기 위함인 듯했다.

    부디 데이릭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빌며 나는 창문을 닫아 버렸다.

    신전에 도착한 후로 나는 곧장 사제들을 찾았다.

    이제는 다른 사제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대회의실에서 사제들을 부르는 벨을 울릴 수 있었다.

    벨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들이 회의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데이릭 모어를 만나셨습니까?”

    “벌써 만나신 겁니까?”

    사제들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를 향해 질문 세례를 쏟아 냈다.

    나는 사람들이 다 모이기 전에 말을 꺼냈다가 돌림노래처럼 또다시 얘기를 반복해야 할 것을 우려해 일단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바론 대주교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회의실의 모든 자리가 채워졌다.

    “서론은 생략할게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호출했어요. 제가 혼자 결정해서 가는 것보다 말씀을 드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씀은?”

    “맞아요. 조금 전에 데이릭 모어를 만났어요. 그리고 신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답도 들었어요. 린제이 사제님께는 사과하고 싶다고 하고요.”

    내 말이 끝나자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데이릭이 탈출한 그제부터 지금까지 내내 근심했을 사제들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데이릭을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혼자 오신 겁니까? 같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요.”

    “안 그래도 제안은 해 봤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제님을 한 분 모셔가서 같이 신전으로 되돌아오는 방법을 제안했어요.”

    “오, 그러셨군요.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혜안이 있으시군요.”

    웃음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나도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듯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사제님 한 분이 저를 따라와 주셨으면 해요.”

    “누구면 되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누구든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제들은 언제든 자신이 따라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모두 둘러본 후에 내가 생각한 사람을 언급했다.

    “제 생각에는 라이넬 사제님께서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하는데요.”

    “제가요?”

    라이넬 사제는 자신을 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사제님이요. 라이넬 사제님이라면 데이릭도 안심하지 않을까 싶어요. 같이 가 주시겠어요?”

    내가 라이넬 사제를 향해 제안하자 라이넬 사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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