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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3)화 (93/174)

93화

생각했던 것보다 데이릭은 빠르게 시인했다. 첫날 보았을 때의 까칠한 모습이나 어제의 우울한 모습을 떠올렸던 내가 좀 더 어르고 달래 줘야 하나 고민한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무슨 소리야? 데이가 쫓기는 중이라고?”

우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제프리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응.”

“왜? 데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거야?”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부정하자 제프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제프리의 시선을 확인하며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데이를 찾는 사람들이 경비병은 아니었거든.”

내가 설명을 덧붙이자 제프리가 수긍했다. 그러더니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쫓기는 거야? 뭐 그 사람들한테서 물건이라도 훔쳤어?”

“……아니.”

데이릭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울한 얼굴로 우리의 눈치를 한번 살핀 데이릭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불행을 몰고 오는 아이라서 그래.”

“뭐?”

데이릭의 작은 목소리에 제프리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그 얘기였다.

나는 플레온 사제에게 들어서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제프리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불행이니 재수니 하는 게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계속해 봐. 들어줄 테니까.”

제프리가 데이릭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데이릭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심호흡하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불행하길 원해. 내가 불행하면 불행해질수록 내게서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나를 지하실에 가두고…….”

데이릭은 그때의 기억이 끔찍했는지 몸을 더욱 작게 웅크렸다.

“가두고 뭘 했는데?”

제프리는 굳은 얼굴로 데이릭의 말을 재촉했다. 끝까지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보통은 여기까지만 들어도 데이릭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제프리는 데이릭에게 있었던 일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하는 듯이 보였다.

제프리를 말릴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에 데이릭은 아픈 과거를 곧 자신의 입으로 언급했다.

“나를 때리고 괴롭혔어.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러다가 쓰러졌던 내가 한참 뒤에 깨어나면 치료해 줬고, 그리고 또다시…….”

데이릭은 그 말을 마치고 몸을 잘게 떨었다. 가늘게 흔들리는 데이릭의 여린 어깨가 그의 공포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데이릭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시 움찔거리던 데이릭이 나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거기서 도망쳐 나온 거야?”

“응.”

데이릭은 신전에서 있었던 일은 생략하고 말했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들의 앞이라는 생각이어서 그런지, 자신이 저지른 죄가 있다는 것을 차마 밝히지 못하는 듯했다.

“다행이네. 도망쳐 나와서.”

제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팩 인상을 썼다.

“근데 대체 그 사람들은 누구야? 왜 데이 너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 거야? 넌 왜인지 알아?”

데이릭은 잠시 제프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어느 순간이 되면 기억이 안 나. 근데 그러고 나면 그 사람들이 기뻐했어. 아마 그사이에 내가 뭘 한 게 아닐까?”

말하면서도 데이릭은 겁을 먹은 눈치로 우리를 살폈다. 우리도 그들과 같아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가이만 같은 놈들이 세상에 아직 많은가 보구나.”

제프리는 ‘가이만’을 언급하면서 이를 으득 갈았다. 그의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주고 종국에는 죽이기까지 한 사채업자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데이릭은 나와 제프리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러더니 눈물이 바닥에 툭툭 떨어져 나무로 된 바닥을 적셨다. 곧 방 안에는 데이릭이 작게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나 제프리는 선뜻 그런 데이릭을 위로할 수가 없었다.

“너희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다 알았으니 날 그 사람들에게 고발할 거지?”

한참 동안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가 싶더니 데이릭이 우리를 향해 물었다.

나와 제프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프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의 고갯짓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왜 널 고발해?”

“그런 짓 안 할 거야. 해봤자 득 될 것도 없고.”

제프리와 내가 차례로 말했다. 데이릭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우리를 확인했다. 벌건 눈가로 눈물이 범벅이었다.

“정말이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당연하지. 우리가 뭐 하러 널 고발해?”

“하지만! ……나는 쫓기고 있고, 또 불행하고 재수 없는 아이인걸.”

우리가 고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데이릭이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언급하는 이유들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네가 재수 없다고? 내가 어제도 말했지? 그런 걸로 치면 나도 만만치 않을 거라고. 그리고 난 사실 경비대에서 정식으로 수배가 된 적도 있어. 너 경비병한테 쫓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배도 쫄쫄 굶어야 해. 간신히 상단의 짐수레에 숨어들어서 이동한다고 쳐도, 실수로 들키면 매타작이나 당하고 쫓겨나기 일쑤라고.”

제프리는 마치 무용담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데이릭은 그 말이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제프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못 믿겠어?”

“으응.”

제프리의 물음에 데이릭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제프리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듯 시선을 주었다.

“제프리 말이 맞아. 제프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배가 돼서 경비대에 쫓기는 몸이었어. 내가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려 수배를 풀기는 했지만.”

내가 제프리의 말에 힘을 실어 주자 데이릭은 더욱 크게 눈을 떴다.

“맞아. 미라벨 도움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경비대에 쫓기고 있었을걸?”

제프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제프리를 바라보던 데이릭은 이내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데이릭이 조금 부담스럽게도 느껴졌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럼 혹시…….”

말을 꺼내던 데이릭은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듣지 않아도 그가 뭘 원하는지는 알 것 같았기에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물론 나로서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이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 도와줄게.”

“정말?”

데이릭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그러려고 온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필요할 거 같아서 챙겨 온 게 있어.”

“뭔데?”

“이거.”

잔뜩 기대하는 제프리의 눈빛을 보며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함을 꺼내었다.

제프리와 데이릭의 기대가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함의 뚜껑을 열었다.

“팔찌?”

제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뭔가를 준비해 왔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내용물이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자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반면 데이릭은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게 뭐야?”

“뭔지 궁금하면 한번 차 봐.”

내가 함에서 팔찌를 꺼내 데이릭에게 건네주었다.

데이릭은 얼떨결에 팔찌를 받아들고 팔찌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됐으니까 한번 껴 봐. 그러고 나서 불만이 있으면 말해.”

“으응. 미안해.”

내가 짜증을 섞어 말하자 데이릭이 이내 수긍하며 팔찌를 꼈다. 팔찌는 금세 데이릭의 손목에 맞추어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 순간 데이릭의 체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빼빼 마른 체형의 남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있었다면, 지금은 살이 보기 좋게 오른 체형에 짧은 금색 머리와 보라색 눈동자를 한 아이가 있었다.

“우와! 신기하다! 모습이 바뀌었어!”

“어? 눈은 안 바뀌었네?”

제프리와 내 감상이 교차했다.

확실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기는 했지만, 데이릭 특유의 보라색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무작위로 외형을 바꿔 주는 팔찌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 무작위에서 제외된 게 보라색 눈동자가 아닌가 싶었다.

“무슨 말이야? 바뀌었다고?”

정작 당사자인 데이릭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이리 와 봐.”

나는 그런 데이릭의 손을 잡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데이릭은 저항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섰다.

“자, 봐.”

거울을 볼 때까지도 데이릭은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곧 거울을 보는 순간, 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헛숨을 들이쉬었다.

그대로 멈추어 버린 것처럼 데이릭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때?”

내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으며 데이릭에게 물었다. 데이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뻐끔거렸다.

“이, 이게…… 나야?”

“응. 그 팔찌, 모습을 바꿔 주는 기능이 있거든. 어때? 이 정도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

내가 웃으며 묻자, 데이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거야?”

그는 황송한 시선으로 자신의 팔에 걸린 팔찌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런 외모라면 사람들도 당분간은 너를 찾긴 어려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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