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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2)화 (92/174)
  • 92화

    [임시방편?]

    비브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응. 나도 데이릭을 구출하러 가면서 모습을 변화시키는 아티팩트를 썼잖아. 기억하지?”

    [이것도 그것과 같은 도구인 모양이구나.]

    “맞아. 지금 다니엘이 데이릭을 쫓고 있다면 그가 직접 쫓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을 시켰을 테니까, 그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데이릭을 찾는 게 아니라면 외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데이릭의 존재를 한동안은 숨길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일리가 있구나. 지금 그 모습대로라면 다니엘에게 잡히고 말 테니까.]

    “응. 근데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야. 만일 다니엘에게 데이릭을 알아볼 특수한 방법이 있다면 우리 생각보다 금방 데이릭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비브르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가 이내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왜 그래?”

    [미라벨 네가 말한 것처럼 확실히 그게 좋은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다니엘보다 빨리 데이릭 모어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대체 데이릭 모어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비브르가 우려하는 바는 우리보다 다니엘이 먼저 데이릭을 찾는 것이었다.

    그의 걱정은 합당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늘 나한테 있었던 일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만났어.”

    [음? 누굴 만났다는 것이냐? 혹시……!]

    비브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풀이 죽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맞아. 오늘 낮에 데이릭을 만났어. 그리고 오늘 밤 어디서 머물지도 알아 놨어.”

    내가 말을 마치자 비브르가 기쁜 듯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거 정말 잘 되었구나. 나는 데이릭 모어를 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나 근심이 한가득이었단다.]

    “걱정 마.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내가 아는 그 장소에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치며 나는 다시금 팔찌가 들어있는 함을 확인했다.

    문제는 데이릭에게 이 팔찌를 어떻게 건넬 것이며, 또 그를 어떻게 설득하여 신전으로 다시 들여보낼지에 대한 것이었다.

    * * *

    아침 식사 시간부터 다니엘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위해 데이릭을 학대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데이릭이 사라져 버렸으니 황당하고 언짢을 수밖에.

    사람을 시켜서 찾고는 있겠지만, 그렇게 빠르게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수도는 넓었고, 사람들은 많았으며, 데이릭은 자신이 쫓기는 입장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사람을 아무리 많이 풀어도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다니엘,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다니엘이 인상 쓰고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한 크라이튼 대공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니엘은 눈만 들어 크라이튼 대공을 보다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아침부터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래.”

    “혹시 어디 아픈 거냐? 그런 거라면 의원을 불러 줄 테니…….”

    “아니야, 아니야.”

    의원을 불러 준다는 말에 다니엘이 두 손을 들어 손사래 쳤다.

    “내 개인적인 문제라 형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오늘 식사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그러려무나.”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던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브르, 오늘도 다니엘을 따라가 줄래?’

    [그렇게 할 생각이었단다.]

    나는 다니엘이 식당에서 나가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비브르에게 부탁했다.

    비브르는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기어가 다니엘의 발목을 감쌌다.

    짧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다니엘은 비브르가 자신에게 붙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곧장 식당을 나섰다.

    “다들 편하게 먹자꾸나.”

    크라이튼 대공이 우리에게 제안했다. 문이 닫히고 다니엘이 빠진 뒤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로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저택을 나섰다.

    일단은 어제 제프리가 말해 주었던 것을 토대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느긋하게 사람들을 구경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내가 어제 데이릭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인지 듀아나 신전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난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좁은 골목을 훑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자들이 다니엘의 사람들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쳐 마침내 제프리가 말한 여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관은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주변 건물들보다 허름하고 낡아 보였다.

    나조차도 처음에는 여기가 여관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몇 번이나 이 골목을 지나쳤다.

    뒤늦게 건물에 달린 해진 종이 쪼가리 위로 여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내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제프리가 용케도 이런 여관을 찾아내었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돈이 많지 않으니 이런 곳으로 숙소를 잡은 거겠지, 싶은 생각에 짠한 마음도 들었다.

    “뉘쇼?”

    카운터에 앉아서 졸던 주인장이 나를 발견하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물었다.

    “무례하군요! 이 분은…….”

    “아냐, 칼리나. 괜찮아. 여기 머무는 손님을 찾아온 것뿐이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

    괜히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칼리나를 말렸다. 그러고는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어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주인장은 은화를 받아 들고 다시 카운터에 팔을 괸 채 눈을 감았다.

    어차피 제프리가 머무는 방은 어제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굳이 주인장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는 주인장을 지나쳐 낡은 계단을 올랐다. 내가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3층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오른쪽 끝 방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러더니 제프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나야, 미라벨.”

    “미라벨? 알았어. 열게.”

    문이 열리고 제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왔네?”

    평소와 다름없는 제프리의 모습이었다.

    “응. 일찍 떠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안으로 들어가도 돼?”

    “들어와.”

    제프리가 문을 활짝 열며 안을 가리켰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칼리나와 아니타를 돌아보았다.

    “금방 나올게. 제프리랑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밖에서 기다려 줄래?”

    “알겠습니다.”

    이미 제프리가 내 친구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칼리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니타도 옆에서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줘.”

    두 사람에게 말을 남긴 후 곧장 제프리가 머무는 여관방으로 들어왔다. 낡고 허름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방 내부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짚으로 채워진 작은 침대 하나와 변색된 나무 책상 하나.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그나마 창이 크게 나 있어서 빛은 잘 들어온다는 점이 긍정적일까.

    “여기서 지낸 거야?”

    내가 용병으로 살면서도 이런 낡은 여관방에서 지내본 적은 없었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프리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묵었던 숙소 중에서는 훌륭한 편이야. 침대가 있잖아.”

    긍정적인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나는 짠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이야?”

    그때, 자다 깬 목소리로 누군가가 물었다. 확인할 것도 없이 데이릭이었다.

    “어? 너.”

    데이릭은 바닥에 모포 하나 깔고 로브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졸린 눈을 비벼 일어났다. 그러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했다.

    “너도 왔냐?”

    “응. 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나랑?”

    데이릭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프리가 아니라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그래.”

    “어…….”

    얼떨떨해하는 데이릭의 앞으로 다가간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가 지금은 보라색이었다.

    “너 사람들한테 쫓기고 있지?”

    “……뭐라고?”

    데이릭이 눈을 크게 뜨며 한 박자 느리게 반문했다. 뒤늦게 그가 몸을 긴장시키는 게 느껴졌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밖에서 사람들이 널 찾더라고. 남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 혹은 금안을 하고 있는 열 살짜리 남자애를 본 적 있냐고.”

    우선은 데이릭을 안심시키기 위해 데이릭을 원하는 사람이 내가 아님을 어필했다.

    데이릭은 다니엘과 듀아나 신전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한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대신 내가 자신의 위치를 발설했을까 두려웠는지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른다고 했어. 일단은.”

    “정말?”

    “그럼 정말이지. 말했으면 내가 여기 왔겠니? 너는 무사했고?”

    데이릭은 내 말을 들은 후에야 내가 다른 사람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퍽 안심했는지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 줘. 너 쫓기는 중 맞지?”

    데이릭이 잠시 고민하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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