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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91)화 (91/174)
  • 91화

    바론 대주교의 승인이 떨어진 후 잠시 회의실에 대기하고 있으니 다른 사제가 작은 함을 하나 가져왔다.

    “자, 여기 있습니다.”

    바론 대주교는 사제에게서 함을 건네받은 후 그것을 다시 내게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함을 받아 한번 안을 확인해 보았다.

    함 안에는 팔찌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내가 어제 했던 것보다는 단조로운 디자인이었다.

    “같은 기능인 거죠?”

    팔찌의 외형이 다르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바론 대주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같은 기능의 팔찌입니다. 다만 너무 화려한 건 눈에 띌 수 있으니 혹여나 그 아이가 곤란해질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수수한 물건으로 가져오라 일렀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확인해 봐도 되나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바론 대주교의 허락을 받은 후 나는 함에 들어 있는 팔찌를 꺼내어 내 팔에 끼워 넣었다.

    그와 동시에 미묘하게 시야 높이가 변했다. 그 외의 변화는 딱히 느끼지 못했다. 간단하게나마 확인을 해 보기 위해서 내 머리칼을 들어 올리자 밝은 분홍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얼굴도 변했나요?”

    내가 고개를 들어 다른 사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바뀌었습니다.”

    대답은 플레온 사제에게서 들려왔다. 플레온 사제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팔찌가 확실히 모습을 바꾸어 준 모양이었다.

    나는 팔에 걸쳤던 팔찌를 빼내어 다시 함에 넣어 두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분실되면 제가 갚을게요.”

    만일의 사태는 언제나 생각해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론 대주교를 향해 말했다.

    모습을 바꾸는 마법 아티팩트라면 꽤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내 조언만 믿고 데이릭에게 사용하게 되었다.

    만일 데이릭이 팔찌만 갖고 도망간다 해도 내게 물어내라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내가 제안한 일이니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배상할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한 일이고, 대의를 위한 일인데 변수가 생긴다고 어떻게 성녀님께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겠습니까? 이는 허가를 내린 제 문제이기도 한 것을요.”

    바론 대주교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럼 저는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시간이 늦어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요. 얼른 들어가 보십시오.”

    바론 대주교가 흔쾌히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고 사제들에게 인사를 마쳤다. 회의실을 나온 나는 최대한 빠르게 신전을 벗어났다.

    신전의 입구로 나오자 내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크라이튼 대공가의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돌아가자.”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칼리나와 아니타에게 말을 꺼낸 후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칼리나와 아니타가 같이 마차에 올라탄 후에야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저녁 식사가 끝날 7시 무렵이었다.

    “미라벨, 왔니?”

    내가 저택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나를 반겼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응.”

    “저녁은 안 먹었는데 괜찮고?”

    “아까 황태자 전하와 외출하면서 많이 먹어서 괜찮아. 걱정했어?”

    “걱정했지, 그럼. 그래도 확인했으니까 됐어. 올라가서 쉬어.”

    “응!”

    가볍게 엄마에게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내 방 앞으로 돌아왔다.

    “참, 칼리나.”

    막 휴식을 위해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칼리나를 돌아보았다.

    “네, 작은 아가씨.”

    칼리나가 웃으며 나를 향해 대답했다.

    “내일 오전에 교양 수업을 뺐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네, 그럼 늦었지만 메이너드 자작 부인께 연락을 드려 놓을게요.”

    “고마워.”

    “그럼 편히 쉬세요, 작은 아가씨.”

    칼리나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남긴 후 곧장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 위에 있던 익숙한 무언가가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비브르.”

    [오, 미라벨. 드디어 왔구나.]

    침대 위에 똬리를 튼 채로 기다리고 있던 비브르가 고개를 들어 날 확인하더니 반색했다.

    내가 침대에 다가가 비브르를 향해 손을 내밀자 비브르가 곧 평소처럼 내 어깨로 기어올라 왔다.

    그러고는 반갑다는 의미로 내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댔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다니엘이 그 브로치 사업을 하고 있었다며.”

    [그래,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비브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에게 오늘 다니엘을 따라다니며 보았던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다니엘 그자가 그 브로치를 만드는 곳에 가게 되었단다. 처음에는 브로치를 제작 판매하는 게 다니엘이 운영하는 상단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지.]

    “응. 그런 거라면 확실히 사업이 성공했겠거니 생각했겠지.”

    실제로 해당 브로치는 이곳 저택의 하인이나 하녀가 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일전에 엄마와 함께 야외에서 식사하던 때에 보았던 하녀도 같은 브로치를 하고 있었고, 칼리나 역시 그 브로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더구나. 물건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모두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었어.]

    “검수하는 사람들이?”

    [그래.]

    “음…….”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팔짱을 껴 잠시 생각에 빠졌다.

    단순히 물건 검수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누가 하든 이상하지는 않았다. 설령 그게 악룡 크립소의 힘에 의해 지배받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내가 주목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근데 데이릭이 아닌데도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말이야?”

    [……그래. 아마도 다니엘이 그 정도의 힘은 개방한 모양이구나.]

    “그건 굉장히 안 좋은 소식이네.”

    내가 짐작한 것보다도 안 좋은 소식이었다.

    악룡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직은 데이릭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면 다니엘이 악룡의 힘을 사용하여 세뇌시킨 자들은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어제 신전에서 데이릭 모어가 사제를 악룡의 힘으로 지배한 것을 보았지?]

    “당연하지. 같이 봤잖아.”

    비브르의 말에 린제이 사제를 떠올렸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본 악룡의 힘에 지배받는 자였다.

    [그녀는 데이릭의 능력으로 지배되어 신전에서도 티 내지 않고 미라벨 너에게 접근했지.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야.]

    확실히 그럴 것 같았다. 나조차도 비브르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린제이 사제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니엘이 사용한 악룡의 힘으로 지배된 자들은 그렇지 않았단다. 아마 미라벨 네가 보아도 한눈에 그자들이 악룡의 힘에 지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거란다.]

    “어떻게? 뭐 드러나는 특성 같은 게 있어?”

    비브르는 내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까지 될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건 설명하기가 좀 어렵구나. 나는 항상 악룡의 힘을 느낄 수가 있으므로 어떤 점에서 그들이 악룡의 힘에 지배되고 있는지 알지만, 인간인 네가 그 어떤 부분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는……. 다만 성녀인 너라면 그들을 보는 순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헷갈릴 일도 없단다.]

    결국, 비브르로부터 어떤 점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한 비브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자들이 지배받는 것 말고, 검수하는 건 아무 문제 없어?”

    [이건 확실하지는 않다만, 브로치에 무슨 특별한 암시를 담는 듯이 보였구나.]

    “암시?”

    [그래. 암시.]

    “그건 또 뭐야?”

    [글쎄, 어떤 종류의 암시였을지는 나도 잘…….]

    비브르가 애매하게 뒷말을 끌었다.

    “뭐야? 너도 몰라?”

    비브르가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온 줄 알았건만, 비브르 역시도 자세한 것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 역시 이전까지는 그 브로치에서 어떤 이상한 점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랬지.”

    비브르는 이전에 내가 브로치를 이상하다 생각했을 때도 단순한 장식품일 것이라 추측했었다.

    미래에 다니엘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에게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마저 브로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막 브로치가 다니엘의 손을 거쳐 나온 것임을 알게 된 상황이니 비브르에게서 완벽한 정보를 요구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이번 한 번으로는 부족해. 몇 번 더 현장을 찾아가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구나.]

    비브르는 내 어깨에서 내려와 침대에 몸을 둘둘 말아 똬리를 틀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조금 처량해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런 비브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 몇 번 더 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해 주어 고맙구나.]

    “그건 어차피 차차 알아가면 되니 됐고, 다음 이야기를 좀 해봐. 다니엘이 데이릭의 실종을 알아차린 거야?”

    브로치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알아보아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다음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 데이릭 모어를 발견한 그 장소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데이릭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되었지.]

    비브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이 당장 사람을 풀어 수도를 이 잡듯이 뒤지도록 했단다. 안 그래도 이대로 데이릭 모어가 다니엘에게 발각되는 것이 순식간일 것 같아 미라벨 네게 경고를 해 주려고 했어.]

    “아, 그거.”

    나는 반사적으로 신전에서 가져온 함을 꺼내 들었다.

    [그게 무엇이냐?]

    비브르가 관심을 보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비브르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니엘에게서 데이릭을 지키기 위한 임시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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