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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8)화 (88/174)
  • 88화

    “미라벨!”

    에이드리안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서 무슨 일인가 확인을 해 보니 에이드리안이 내게 케이크를 들어 내밀고 있었다.

    먹으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괜찮다고 거절할까 생각하다가 나한테 주는 성의를 생각해 한입 받아먹었다.

    “고마워요.”

    “아니야. 잘 못 먹는 거 같아서 미라벨 건 맛이 없나 했어.”

    달콤하게 녹아드는 생크림과 폭신한 빵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조화되는 듯했다.

    과하게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에 맞춘 건지 먹기에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어때? 맛있지?”

    “네, 맛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에이드리안이 뿌듯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라면 미라벨도 좋아할 거 같았어.”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예상치도 못한 에이드리안의 친절이었다.

    “미라벨.”

    “응?”

    갑작스럽게 제프리가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이번에는 제프리가 예쁘게 담긴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내게 내밀고 있었다.

    “아냐, 괜찮으니까 제프리 너 먹어.”

    웃으며 거절하자 제프리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게 보였다.

    내가 케이크 좀 안 먹었다고 많이 실망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먹을게.”

    하는 수 없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제프리에게 말했다. 제프리는 그제야 얼굴에 화색을 띠며 다시금 케이크를 내밀고 있었다.

    가볍게 한입 먹은 후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았다. 마찬가지로 달콤한 케이크의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이것도 맛있네. 이건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건데, 다음에는 나도 너희가 먹었던 거로 시켜야겠다.”

    나는 케이크와 메뉴판에 적힌 그림을 잘 대조해서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내 거 먹기도 바빠 죽겠는데 대단하다, 너희.”

    곁에서 하는 양을 지켜보던 데이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는 나와 에이드리안, 그리고 제프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 끄고 너 먹을 거나 먹어.”

    제프리가 툴툴거리듯 그에게 얘기했다. 데이릭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 앞에 있는 케이크를 조금씩 떠 입안에 넣고 음미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케이크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비었다.

    처음에는 에이드리안이 너무 많이 시키기에 다 못 먹을 텐데 조금 아깝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내 기우였다.

    에이드리안은 그 자리에서 주문한 모든 케이크를 다 먹은 것이었다.

    “이런 걸 먹고도 배부를 수가 있는 거구나.”

    데이릭이 마지막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먹는 사람은 에이드리안과 데이릭뿐이었다.

    이제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붉은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벌써 석양이 지는 모양이었다.

    종일 먹은 기억만 갖고 하루가 끝나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곧 헤어질 것 같았기에 나는 조금만 더 테이블에 앉아 휴식하기를 청했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바로 데이릭에 관해서였다.

    다니엘이 데이릭의 실종을 알게 되었다면, 필시 사람을 풀어 데이릭의 행방을 쫓기 시작하겠지.

    데이릭을 들키지 않으려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역시 듀아나 신전에 데려가는 거겠지만, 데이릭이 듀아나 신전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지금, 억지로 데려갔다가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크라이튼 대공가로 데려갈 수도 없었다. 크라이튼 대공가에 다니엘이 상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선택이 되겠지만, 다니엘은 크라이튼 대공가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듣기로는 따로 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와 내가 크라이튼 대공가로 돌아오고 난 후로는 줄곧 크라이튼 대공가에서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결국, 데이릭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걸까…….

    짧은 갈등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채웠다.

    딱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 데이.”

    내가 골머리를 앓는 사이에 제프리가 데이릭을 불렀다.

    더는 못 먹겠다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데이릭은 피곤한 눈으로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왜?”

    “너 갈 곳은 있어?”

    “…….”

    제프리의 짧은 물음에 데이릭은 꿀이라도 먹은 듯 조용해졌다.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데이릭은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 없었으니까.

    빈민가 출신이며, 아까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신 듯했다.

    그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다니엘에게 잡혀 악룡 크립소의 부활을 위한 도구로 학대당하다가 나를 비롯한 듀아나 신전 사람들에게 구출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도망 나와 버리는 바람에 데이릭은 지금 듀아나 신전에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심지어는 다니엘 역시도 그를 쫓기에 이르렀지.

    지낼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할 여건도 되지 않는 그에게 갈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없어?”

    제프리가 대답을 재촉했다. 데이릭은 제프리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응.”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제프리는 그런 데이릭을 바라보다가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미라벨, 이 녀석 내가 데리고 갈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전혀 뜻밖의 말에 놀라서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제프리는 뭐 문제 있냐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아니, 뭐. 갈 곳도 없다고 하잖아. 보니까 사정도 있는 것 같고.”

    데이릭을 바라보는 제프리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건 동질감이었다.

    속사정은 많이 다를 테지만, 제프리 역시 좋지 않은 일로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그런 제프리의 앞에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처지로 추정되는 아이가 나타났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냥 오늘 밤에 잘 곳 정도는 내가 마련해 주고 싶어서 그래.”

    제프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제프리 너, 따로 숙소를 잡은 거야?”

    불현듯 드는 생각에 그에게 묻자 제프리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어? 안 돼?”

    내가 묻는 소리에 제프리가 도리어 당황한 듯 내게 반문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수도에 왔으면 우리 저택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했잖아.”

    “그랬지.”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근데 머무르고 머무르지 않고는 내 마음이잖아. 난 가급적이면 내 힘으로 살 거야. 그러니까 너희 집에 머무르지 않아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제프리의 말투는 단호했다.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마 외부의 숙소보다 크라이튼 대공가의 손님방이 더욱 고급 가구들로 꾸며져 있고, 호화스러울 텐데도 그는 신세를 지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알겠지?”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막지는 않을게. 그럼 숙소에 데이도 데려가려고?”

    “응.”

    “잠깐만!”

    제프리와 내가 대화 나누는 소리를 빤히 듣고 있던 데이릭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왜?”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를 바라보니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 왜 내가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네가 갈 데가 없으니까.”

    “…….”

    데이릭의 질문에 제프리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데이릭은 차마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안 그럼 밖에서 노숙이라도 하려고?”

    “그, 그래.”

    데이릭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긍정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진짜 속마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진짜 노숙할 거야?”

    데이릭이 노숙을 선택하자 제프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데이릭을 응시했다.

    데이릭은 제프리의 시선에 마음이 찔리는지 망설이다가 이내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따라와. 좀 허름한 여관이지만, 그래도 밖에서 노숙하는 것보다 지내기는 편할 거야.”

    “…….”

    데이릭은 더는 거절하지도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듯했다.

    “너희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러더니 한참 뒤에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뭘?”

    다짜고짜 물어보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라벨 너도. 그리고 제프리 너도. 대체 왜 날 도와주려는 거야?”

    경계심 어린 말에 제프리와 내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대답을 꺼낸 것은 제프리였다.

    “그냥.”

    “그냥?”

    그러나 들려온 대답에 데이릭이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제프리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그런 데이릭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래, 그냥. 이유가 필요해?”

    “당연히 필요하지! 세상에 이유 없는 친절이란 없는 거니까.”

    “지금까지 잘 받아 놓고 왜 갑자기 그래?”

    “그건……!”

    반박하려던 데이릭이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렇지만.”

    “그냥 받아. 내가 널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겁을 내?”

    “…….”

    결국 데이릭은 제프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건네는 감자 한 알 같은 친절이라고 생각해.”

    제프리는 그런 데이릭을 향해 말했다.

    나는 제프리가 언급한 감자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제프리는 내가 자신을 볼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휘어 웃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베풀었던 작은 감자 하나의 친절이 또 다른 친절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도 데이릭은 제프리가 무슨 의미로 감자를 언급한 건지 알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대충의 뉘앙스는 알아들은 듯했다.

    “어떻게 할 거야? 안 갈 거야?”

    제프리가 데이릭에게 물었다. 데이릭은 잠깐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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