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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7)화 (87/174)
  • 87화

    “뭐야? 미라벨, 너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제프리가 내 옆에서 내 걸음을 맞추어 걸으며 작게 속삭였다.

    제프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데이릭의 뒷모습을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제프리는 내가 데이릭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프리에게 얘기할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별거 아냐.”

    나는 괜히 제프리까지 이 일에 얽히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 일은 어린 제프리에게는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나야 듀아나 신전의 성녀로서, 또한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어른으로서 이번 일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제프리는 이제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괜히 이 일과 얽혔다가 다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뭐, 일전에 플레온 사제가 훗날 용병왕 제프리의 조력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는 했지만, 지금의 제프리는 용병도 아니고, 용병왕은 더더욱 아니었다.

    시일이 지나 언젠가 필요에 의해 제프리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란 얘기였다.

    “얘기 안 해 줄 거야?”

    그러나 제프리는 내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점이 불만이었는지 팩 인상을 썼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 내가 화내는 게 웃겨?”

    제프리가 씩씩거리며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웃기기도 했다. 이제 열한 살 된 어린이가 화난 티를 역력히 내고 있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아냐, 진짜 별거 아니래도.”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제프리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더 캐물으면 뭐라고 둘러댈까 생각해 두려는데, 제프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한숨 소리가 큰지 내가 다 놀랄 정도였다.

    “됐어. 네가 말 안 해 주는 거면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미라벨, 혹시 위험한 일이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나한테 말해.”

    제프리가 체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었다.

    “네가 부탁하면, 난 언제든 널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필요하거든 말해. 이래 봬도 난 너보다 세 살이나 더 많고, 또 너보다 강하니까.”

    시선을 돌려 제프리를 확인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제프리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는 듯도 했다.

    고작 열한 살밖에 안 되었으면서 벌써부터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제프리가 기특했다.

    “왜?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응?”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자신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건지 제프리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니야. 나중에 네 도움이 필요하면 꼭 부를게.”

    제프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이 표정을 풀었다.

    “나야말로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도울 테니까 편하게 얘기해. 그리고 저택으로 자주 찾아오고.”

    “응. 알겠어. 대신 너무 많이 찾아온다고 쫓아내지는 마.”

    제프리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당연하지.”

    나 역시 긍정을 표하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미라벨!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제프리와 함께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으니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던 에이드리안이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맞아요. 앞으로 쭉 가시면 돼요.”

    “알았어!”

    에이드리안은 내 대답에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인 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오래 걸리지 않아 디저트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메뉴를 확인해 보시고 주문 부탁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인원수대로 우리 앞에 준비해 주었다.

    우리는 각자 하나씩 메뉴판을 붙잡고 주문할 메뉴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도 먹고 싶고, 또 이것도…….”

    에이드리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다 먹고 싶은 마음이었던 건지 그는 보이는 메뉴 중 원하는 모든 메뉴를 전부 주문하고 있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돈이 무서워서라도 절대로 하지 못했을 일이었지만, 어쨌든 에이드리안은 황태자였기에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뭐, 나 역시 마찬가지로 금액에서 자유롭기는 했다.

    반면, 제프리와 데이릭은 메뉴를 고르는데 신중했다.

    나는 테이블에 상체를 기댄 채로 제프리와 데이릭이 열심히 메뉴판을 훑는 것을 보았다.

    “고민되면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돼.”

    “응? 하지만…….”

    데이릭이 내 말에 당황하며 메뉴판을 확인했다.

    확실히 디저트는 값비싼 것들이 많았기에 다 시켜도 된다는 내 말에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진짜야. 아무거나 다 시켜도 돼.”

    내가 손을 들어 턱을 괴며 말하자 제프리와 데이릭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제프리가 세 개, 데이릭이 세 개를 주문했다.

    나 역시도 용병이 되어 돈깨나 벌었던 당시에 이 디저트 가게에서 즐겨 먹던 메뉴 두 개를 골라 주문했다.

    “두 개로 돼?”

    에이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디저트를 무려 일곱 개나 주문한 에이드리안이었으니 입맛대로 두 개만 주문한 내가 놀라워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사실 내가 두 개 주문한 것도 평균적으로 치면 많은 거였다.

    지금 당장 주변 테이블을 둘러본다고 해도 이 정도로 많이 시키는 곳은 없다시피 했다.

    보통은 한 사람당 하나 내지는 두 개 정도 시키는 곳이었다.

    “두 개면 충분하죠. 식사도 했고.”

    “하긴, 미라벨 넌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에이드리안이 뒤늦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한 음식은 천천히 준비되는 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스를 마시며 아이들이 각자의 디저트를 음미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달콤한 음식이 들어가자 에이드리안도, 제프리도, 데이릭도 조용해졌다.

    특히나 이런 디저트가 익숙하지 않은 제프리와 데이릭은 한 입을 먹을 때마다 뺨을 붉게 물들이며 기뻐하는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미라벨.]

    한참 아이들이 먹는 것을 지켜보는 와중에 비브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며칠간 비브르가 내 곁을 떠나 있었던 탓에 그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니엘에게서 무언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말인가 싶어 몸이 절로 긴장되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태연히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비브르가 어디 있을지 생각하느라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다니엘이 빈민가로 향하는 중이야.]

    ‘지금?’

    [그래.]

    다니엘이 지금 빈민가로 향하는 중이면 곧 데이릭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다니엘 역시 사람을 풀어 데이릭을 찾겠지.

    신전도 데이릭을 찾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데이릭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은 듀아나 신전과 달리, 다니엘은 데이릭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듀아나 신전에서는 데이릭의 외형을 열 살 남짓한 나이의 남색 머리, 금안을 한 소년으로 알고 있었다. 그 외에 특징적인 건 남아 있지 않아서 사실상 사람을 풀어놓았지만 헛수고일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데이릭은 금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아무리 데이릭을 찾아도 그가 금안일 때에 발견하지 못하면 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 전까지의 경로는 어때?’

    [오늘 아침부터 사업 때문에 바빴는지 오전에는 특이한 사항이 없었단다.]

    그건 다행이었다. 적어도 돌발 상황은 생기지 않은 듯했다.

    여기서 또 다른 상황이 발생해 버리면 오히려 곤란했다.

    ‘잘됐네.’

    [그런데 일전에 미라벨 네가 얘기했던 그 브로치 기억하느냐?]

    ‘브로치?’

    무슨 말인가 싶어서 기억을 되짚으니 금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니엘이 항상 옷에 하고 다니는 두 개의 원이 교차하는 모양의 브로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왜? 뭐 문제라도 있어? 그거 관련 없는 거 같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다니엘이 계속 하고 다니는 점이나,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 몇몇이 그 브로치를 똑같이 하고 다니는 점이 수상해서 비브르에게 물어보았지만, 연관이 없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래서 나도 브로치에 대한 건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비브르가 브로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구나.]

    ‘무슨 뜻이야?’

    [오늘 확인해 보니 그 브로치를 제조해서 유통하는 게 다니엘이었단다. 근데 단순히 사업용으로 파는 것 같지는 않구나.]

    비브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니엘이 브로치를 제작하고 판매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외였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나는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과 별개로 그만의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가 브로치를 매일 빠짐없이 하는 이유도 설명이 됐다.

    본인이 만들어 유통하는 브로치였으니 본인이 하고 있어도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 브로치가 단순히 사업용이 아니었다고?

    [음, 그 이야기는 이따 저택에 돌아가면 해 주마. 우선 지금은 다니엘이 막 지하로 들어가는 중이란다. 충분히 둘러보고 다시 연락하도록 하마.]

    ‘알았어. 뭔가 발견하거나 이상한 점을 찾으면 바로 알려 줘.’

    [그러마.]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비브르의 음성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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