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식사를 모두 마친 우리는 곧 식당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음에 있을 디저트 가게는 광장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리상으로라면 우리가 처음 제프리와 데이릭을 만난 시장에서 디저트 가게가 더욱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고스란히 거슬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내가 생각했던 오후 일정은 한가하게 수도를 돌며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많은 변수가 생겨 결국은 그 계획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처음에는 아니타와 칼리나, 그리고 펠릭스 정도만 대동한 채 외출하려던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에이드리안이 저택으로 방문하여 일차적으로 바뀌게 되었고, 제프리와 데이릭을 만나 이차적으로 바뀌게 된 셈이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꼭 아이들의 보모가 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기만 하다가 다들 함께 수도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왁자지껄해서 정말 놀러 다니는 것 같았다.
한참 에이드리안이 재잘거리는 걸 들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돌연 데이릭이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왜 그런가 싶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데이릭은 맞은편 길목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데이?”
내가 작은 목소리로 데이릭을 불렀다. 그제야 데이릭이 흠칫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데이릭의 눈동자가 보라색에서 금색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에 나 역시도 놀라 데이릭을 보고 그대로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데이릭은 황급히 로브를 뒤집어쓴 후 우리 일행 사이에 더욱 깊이 섞여 들었다.
나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데이릭이 왜 갑자기 그런 반응을 보인 건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혹시 미라벨 님 아니십니까?”
그러나 그 원인은 내가 찾기도 전에 나에게 다가왔다.
내 이름을 부르며 알은체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듀아나 신전의 사제 한 명과 성기사 한 명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데이릭을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데이릭이 이상 반응을 일으킨 것은 듀아나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를 보았기 때문인 듯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현재 데이릭은 듀아나 신전으로부터 추적을 받는 중이었으니까.
나에게 알은체한 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갈까 걱정되어서 그런 반응을 보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외출하는 중이십니까?”
다시금 사제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대사제는 아닌 평사제로 수련장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제였다.
나는 잠시 그들을 보며 고민했다.
지금 데이릭의 존재를 두 사람에게 알린다면 데이릭을 붙잡기는 쉬울 터였다.
안 그래도 듀아나 신전에서 총력을 기울여 데이릭을 찾고 있었으니, 내가 제보하기만 하면 쓸데없는 인력 낭비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반발심만 더 키우게 될 뿐이었다.
데이릭이 듀아나 신전이 자신을 감금하려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혹시나 데이릭이 오해하여 린제이 사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악룡의 힘으로 지배한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결과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듀아나 신전에서 원하는 건 데이릭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를 죽인다면 일은 더욱 간단하게 해결되겠지만, 신전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그가 악룡을 깨우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모두가 불행해질 수도 있는 미래를 바꿔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듀아나 신전의 보육원에서 그를 보살피려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데이릭이 다니엘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했다.
만약 데이릭이 다니엘에게 붙잡히게 된다면, 마력의 개방을 위해 끊임없는 학대를 받게 될 테니까.
데이릭을 위해서, 그리고 다니엘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를 신전에서 보호해야만 했다.
적어도 듀아나 신전은 다니엘의 마수가 뻗을 수 없는 곳이니까. 오히려 그를 적으로 상정하여 경계하는 곳이 바로 듀아나 신전이었으니 다니엘에게서 보호하려면 듀아나 신전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었다.
게다가 아직은 우리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데이릭은 그 학대로 인해 마력을 개방하고 나면 죽게 될 터였다.
비브르가 보았던 미래에서 데이릭의 존재가 없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었다.
모든 일이 데이릭 본인을 위한 일이었으나, 그가 믿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어긋나고 말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데이릭을 달래기 위해서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를 설득하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오늘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당장 그를 제보해서 그에게 듀아나 신전에 대해 더욱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네. 오후에 모처럼 시간이 남아서요.”
나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데이릭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은 채였다. 내 말을 들은 사제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으니 이런 날도 있어야겠지요. 그럼 몸조심하시고,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네, 사제님과 기사님도요.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사제의 인사에 맞추어 나도 그에게 인사했다. 성기사는 한 걸음 뒤에서 나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네고 난 이후에야 두 사람이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두 사람이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고개를 돌려 데이릭을 확인했다.
데이릭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몸을 돌려 사제들이 지나가는 것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데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데이릭을 불렀다. 그러자 데이릭이 홱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했다.
나를 향하는 것은 오늘 하루 동안 보았던 조금은 까칠하고 또 조금은 우울한 눈과는 다른 예민하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게다가 시릴 듯한 금안.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눈동자 색이 영 마음에 걸렸다.
아까 소란이 있었을 때 그를 확인하며 그의 눈동자 색깔이 바뀐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상에 눈동자 색이 자유자재로 바뀐다는 것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혹시 이 현상이 악룡 크립소와 관련된 것일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신전에서도 그는 금안이었다. 플레온 사제마저 데이릭의 인상착의를 남색 머리칼에 금안을 하고 있는 아이라고 했으니 아마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룡의 힘에 지배당한 린제이 사제의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가 금안일 때 악룡 크립소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왜 그래? 괜찮아?”
그럼에도 나는 데이의 그런 변화를 모르는 체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데이릭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내가 접근하는 것을 보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데이릭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같이 있던 제프리 역시 데이릭의 이상을 알아보고 나에게 물어왔다.
“데이가 좀 이상해서.”
내 말에 제프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데이릭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 녀석 눈…… 보라색 아니었나?”
“너, 아까 그 녀석들이랑 무슨 사이야?”
제프리를 돌아보려는 사이에 데이릭이 입을 열었다.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가 마치 날을 세운 고양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사이냐니. 그냥 신전 오가며 얼굴 몇 번 본 사이인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수련장에서 몇 번 본 게 다였으니까.
“정말이야?”
“그럼 거짓말이겠니?”
내가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한쪽 눈썹을 기울이자 데이릭이 경계를 한 꺼풀 풀어냈다.
데이릭이 왜 나를 그렇게 경계하는지 이해는 갔다.
그는 내가 혹시나 신전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거였다.
물론, 신전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데이릭을 신전에 제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고한 사람인 척 연기했다.
그러자 데이릭의 금안이 천천히 보라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방금…….”
함께 데이릭을 바라보고 있던 제프리 역시 눈을 보았는지 입을 열려는 것 같아서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반사적으로 나를 돌아본 제프리가 왜 그러냐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그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뜻의 눈빛을 보냈다.
제프리는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이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방금은 미안.”
날카롭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데이릭이 작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아냐. 뭘 했다고. 사과할 거 없어.”
“……응.”
“근데 왜 갑자기 그런 거야? 신전 사람들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어?”
모르는 체하며 묻자 데이릭이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말을 아끼려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데이릭에게 성급하게 신전을 언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으응. 아니, 그냥…….”
데이릭은 대충 얼버무린 후 나를 외면했다.
“가, 가자.”
“알았어.”
데이릭이 먼저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도 제프리도 잠시 데이릭의 뒷모습을 살피다가 그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