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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4)화 (84/174)
  • 84화

    데이릭이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나는 잘됐다고 생각하며 데이릭을 잡고 있던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놓아줘.”

    “예, 작은 아가씨.”

    내 부탁에 펠릭스가 데이릭을 놓아주었다. 데이릭은 펠릭스에게 잡혔던 팔을 이리저리 흔들어 확인했다.

    “아프니?”

    내가 묻자 데이릭이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조금.”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데이릭이 대답했다.

    “그럼 팔 좀 줄래?”

    “응?”

    내가 손을 뻗으며 제안하자 데이릭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평소 구비하고 다니던 신전 치료제를 꺼내 제프리와 펠릭스가 잡았던 손 위에 뿌려 주었다.

    치료제는 작은 빛을 내며 데이릭의 팔에 흡수되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데이릭은 흠칫 떨더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나 싶어 그를 바라보자 데이릭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치료해준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러나 싶어 물었다.

    혹시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기 때문에 치료제가 오히려 안 좋게 드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 되었다.

    “어디 아파? 내가 치료제 부은 거 혹시 따갑고 아프니?”

    보통은 따뜻하고 온화한 기분이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다르게 느껴진다면 치료 같은 건 전혀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데이릭은 불안해하는 시선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을 보니 치료제가 아파서 놀란 건 아닌 듯했다.

    그럼 놀라서 그런 건가?

    아니다. 놀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이 경우라면 차라리 신기해하는 게 더 알맞을 듯했다.

    그럼 다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제 플레온 사제가 데이릭에 대해서 조사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다니엘은 데이릭을 지하에 감금하고 학대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데이릭이 기억을 잃는 동안에 무언가가 벌어지고 나면 그 뒤에 데이릭을 다시 치료해 주었다는 말이었다.

    그럼 그때, 데이릭이 치료받는 과정에서 사용된 게 내가 사용한 것과 같은 치료제였던 건 아닐까?

    그래서 데이릭이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확실히 그게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크게 고생했을 데이릭이 안타까워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를 두드려 줄 참이었는데, 데이릭이 먼저 겁을 먹고 몸을 웅크리는 탓에 멈추고 말았다.

    결국, 나는 데이릭을 향해 뻗었던 손을 회수해야만 했다.

    “괜찮아?”

    “아, 응.”

    뒤늦게 안정을 되찾았는지 데이릭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이전보다 더욱 편안해 보였다.

    “그럼 다행이고.”

    말을 마친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제프리를 돌아보았다.

    제프리는 내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자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제프리, 너도 갈 거지?”

    생각해 보니 제프리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같이 갈 거냐고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프리는 내 질문에 황당하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서운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는데 네 생각을 따로 안 물어봐서 안 가면 어쩌나 했거든.”

    “안 그래도 오랜만에 수도에 와서 네 얼굴 한번 보려고 했어.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다행이었지.”

    제프리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제프리 역시 나를 만나러 올 계획이었다고 하니 신기했다.

    어떻게 에이드리안도, 그리고 제프리도 오늘 같이 만날 수 있었는지.

    정확히 따지자면 에이드리안은 내가 쉬게 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온 거였지만, 어쨌든 오늘도 한꺼번에 두 명이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았다.

    “지난번에 떠났던 일은 어떻게, 잘됐어?”

    “뭐, 그럭저럭.”

    “원하는 대로 되어 가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나는 말을 마치고 다시 데이릭을 확인했다. 데이릭은 멋쩍은 얼굴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배고픈 거 같으니까 뭐라도 먹을 수 있게 식당을 찾아 보자.”

    “으응.”

    기대감 반, 민망함 반인 표정으로 데이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다시 움직여요.”

    “응!”

    “네!”

    내 말에 가장 기운차게 대답한 건 에이드리안과 아니타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가 용병 생활을 하던 때에 수도에서 가장 유명했던 식당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30년 넘는 식당이라고 내걸었으니 틀림없이 식당이 남아 있을 터였다.

    “작은 아가씨는 수도 지리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아시는가 보군요.”

    데이릭이 예상외의 행동을 할지도 몰라, 대비하기 위해 내 바로 뒤에서 따라다니기로 한 펠릭스가 신기해하며 물었다.

    “왜, 왜?”

    왜냐고 반문하면서도 사실은 펠릭스가 이렇게 묻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의 고향은 수도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도망쳐 나와 자리 잡은 동네인 델피아 마을 출신이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크라이튼 대공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델피아 마을 출신인 내가 수도에서 길을 너무 잘 찾는 것도 모자라서, 수도에 있던 사람들조차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으니 신기하게 느껴질 법도 했다.

    “꼭 수도 출신 같습니다. 길도 잘 아시고, 또 여러 가지로 아시는 게 많으니까요.”

    아마도 펠릭스는 날 추켜세우기 위해 한 말일 테지만, 속으로 크게 뜨끔한 나는 앞으로는 잘 모르는 척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웃었다.

    “아니, 그냥. 맛있는 식당이 이 근처에 있을 것 같아서. 봐, 여기 다 식당들이잖아. 식당 골목이면 당연히 맛있는 식당이 있겠지.”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설명했다.

    “하긴, 그렇기는 하겠군요.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엄지를 들어 보이는 펠릭스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오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데이, 너.”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제프리가 데이릭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데이릭의 전체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그가 알려 주다 말았던 ‘데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데이릭은 딱히 그 사실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본명을 말했다가 자신이 쫓기고 있는 신세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또 낭패일 테니까. 혹시나 누군가가 그를 밀고해 버릴까 봐 걱정하는 듯도 했다.

    그러니 다들 ‘데이’가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정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왜?”

    데이릭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제프리에게 대답했다.

    “근데 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이릭은 제프리가 왜 그러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뭐가?”

    “아니, 우리 이름 말이야. 네 이름은 밝혔는데 우리 이름은 하나도 안 물어보잖아.”

    제프리의 궁금증은 그거였다.

    같이 다니는 동안 통성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나마 나만 데이릭과 인사하며 이름을 말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소개나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아, 그거……. 이름 말해 주기 싫을까 봐.”

    데이릭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프리는 데이릭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팩 찌푸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 말라 그랬지?”

    “으, 응.”

    뒤늦게 대답한 데이릭이 흘긋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럼 이름 알려 줄래? 미라벨은 들었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어서.”

    “난 제프리야. 제프리 콜먼. 장차 커다란 용병단의 단장이 될 몸이지.”

    제프리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와! 용병단? 제프리 너 용병할 거야?”

    제프리의 말에 눈을 빛낸 건 에이드리안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아니타와 재잘거리면서 걷다가 제프리의 말을 듣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제프리를 향해 다가왔다. 지나칠 정도로 눈을 밝히는 게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제프리는 당당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계획을 실행 중이지. 용병패만 받아 봐. 내가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용병이 돼 있을걸?”

    “우와! 우와! 멋지다!”

    에이드리안은 몇 번이나 감탄을 터트렸다. 물론 에이드리안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멋지다……. 나도 언젠가 그런 식으로 꿈을 갖게 될까?”

    꿈이 있는 제프리의 당당한 모습이 부러웠는지 데이릭 역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프리는 말해 뭐하냐는 눈빛으로 데이릭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그걸 꿈으로 가지면 되겠네. 멋진 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

    “헉!”

    제프리의 말에 데이릭은 크게 감동을 받은 듯했다.

    아이들이 서로 감동받고 감동을 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우습고 귀여웠다.

    “음, 그럼 나는, 음……. 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는데…….”

    에이드리안 역시 멋진 미래 계획을 밝히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제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듯한 눈치였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멋진 황제 할래.”

    에이드리안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어…….”

    제프리가 수긍하고, 데이릭이 헛숨을 들이쉬었다.

    “함부로 밖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반역죄로 처벌 받을 수 있다고.”

    데이릭이 왜 놀랐나 했더니 에이드리안이 황제라고 한 것에 놀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그게 왜 벌을 받는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하지만 난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데?”

    “뭐?”

    에이드리안도, 데이릭도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프리가 나를 향해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려 줘도 되는 거야?”

    “뭐, 큰 소리만 아니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우리 뒤에 있는 수행원들 때문에 우리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거 웬만하면 다들 눈치 챘을 거야.”

    “그래?”

    “응.”

    제프리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내 수행원은 칼리나와 아니타, 그리고 펠릭스뿐이었지만, 에이드리안은 아니었다.

    달리아를 포함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우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제프리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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