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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3)화 (83/174)
  • 83화

    “너희랑…… 같이 다니자고? 오늘 하루 동안?”

    데이릭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어때? 싫어?”

    “당연하지! 너 같으면 가겠냐?”

    데이릭은 예민한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저항했다. 물론 물리적으로 내게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악룡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면서 데이릭은 자신을 잡은 커다란 체구의 펠릭스가 무서운 듯했다.

    “따라오면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또 선물도 해 줄게. 그냥 오늘 하루 같이 놀자는 거야.”

    “뭐……?”

    맛있는 것을 사 준다는 말에 데이릭의 예민함이 한풀 꺾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내내 쫓기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 다니는 내내 뭐 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 했겠지.

    배고픈 설움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길바닥에서 구르다 보면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다.

    게다가 데이릭은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디 제대로 나가지도 못할 거고, 구걸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돈도 없을 테니 뭐라도 사 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데이릭이 왜 제프리의 주머니를 노렸는지 너무 이해가 갔다.

    소매치기라도 해서 먹을 걸 좀 구해 보려고 했을 테니까. 다만, 하필이면 상대가 제프리여서 바로 걸려 버린 게 문제였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데이릭의 하루가 조금은 불쌍하게도 느껴졌다.

    듀아나 신전 보육원에 있으면 따뜻한 곳에서 배는 곯지 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어째서 보육원까지 도착한 후에 도망을 쳤을까?

    악룡 크립소 때문일까? 그래서 듀아나 신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만일 그런 거라면 데이릭은 듀아나 신전 사람들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기는 했지만, 신전에서 원하는 것은 데이릭의 죽음이 아니었다.

    물론, 악룡의 봉인을 깨트릴 존재를 죽이면 그 어느 때보다도 상황이 긍정적으로 흘러가게 되겠지.

    그 이점을 생각하면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듀아나 여신님은 자비의 여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마도 신전에서 그를 죽이는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일례로, 회의실에서 회의할 당시, 사제들은 데이릭을 데려와 듀아나 신전의 교리를 가르치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그 전제 조건이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다는 것이었으니 아마 내 생각과 듀아나 신전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데이릭에게 우리를 따라오라고 한 것은 단순하게 그와 놀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저곳 다니며 그를 좀 구슬려서 다시 신전으로 보내 보려는 계획이었다.

    오늘 하루 친해지면 내 말을 좀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머, 먹을 것 좀 사 준다고 내가 따라갈 것 같아?”

    꼬르륵.

    내 말에 혹하지 않을까 싶어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데이릭이 정신을 차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배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데이릭이 자신의 배를 감싸 쥐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쩐지 옛날에 이런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제프리를 돌아보았다. 제프리도 떠오르는 바가 있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배고파 보이는데, 우리 우선 뭐라도 좀 먹을까?”

    “그, 그게…….”

    배고픈 상태라는 것을 들켰으니 배고프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고, 자존심만 세우기에는 배에서 연신 천둥이 치고 있었으니 데이릭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또 저러지도 못한 채로 눈을 굴리는 것을 보아하니 조금만 더 꼬시면 넘어올 것 같았다.

    “저 앞에 달콤한 케이크로 유명한 집이 있어. 먹고 싶지 않아? 원한다면 사 줄 수 있는데.”

    “……웃기지 마. 그런 수작에 넘어갈 것 같아?”

    내 말에 반발하는 것치고는 시선이 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먹고 싶기는 한 모양이었다.

    “싫어?”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데이릭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이곳을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는 게 아니라 내 일행들을 살피는 것이었다. 눈높이가 달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다른 녀석이 싫다고 하면 안 될 거잖아. 괜히 그런 말로 들뜨게 했다가 실망하게 하지 말라고. 그리고 난…….”

    데이릭의 본심이 나왔다.

    그가 왜 이렇게 나를 경계하는지 궁금했는데 그저 경계가 아니라 상처 입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나 보다.

    나는 에이드리안을 돌아보았다.

    내 경험상 사람을 좋아하는 에이드리안이 데이릭의 동행을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형식상 물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어때요? 이 아이랑 같이 다니는 거 싫어요? 싫으면 제가 포기할게요.”

    내가 묻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싫어? 난 좋은데? 미라벨이 좋으면 나도 좋아. 그러니까 미라벨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역시나 에이드리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거봐란 듯이 어깨를 한번 추어올리며 데이릭을 확인했다.

    “그렇다는데?”

    “하, 하지만! 너희는 아직 어린애들이잖아! 어른들한테 허락도 맡아야 할 거고! 그럼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

    데이릭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마지막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데이릭의 말이 맞기는 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른의 동의를 구해야겠지. 하지만 우리 일행은 에이드리안의 동의와 내 의지만 있으면 사실 데이릭 한 명이 추가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데이릭이 그토록 걱정하니 나는 나를 따라온 칼리나와 에이드리안을 따라온 달리아를 확인했다.

    “같이 동행해도 되지?”

    “그럼요. 대신 펠릭스 경과 함께 다녀야 해요.”

    “저도 동의합니다.”

    대답은 금방 나왔다. 나는 어떠냐는 듯 데이릭을 바라보았다.

    데이릭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그, 그럼 네 친구처럼 보이는 쟤는? 쟤는 내가 주머니를 훔쳤으니 싫을 거 아니야.”

    마지막 화살은 제프리에게 넘어갔다.

    제프리는 팔짱을 끼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 옆에 선 제프리가 상체를 조금 숙여 데이릭과 눈높이를 맞췄다.

    제프리의 푸른 눈동자가 데이릭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제프리가 씩 웃음을 지었다.

    “나도 찬성인데?”

    “윽……!”

    제프리에게까지 확답을 받은 데이릭의 눈에 말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아롱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점점이 물들인 눈물 자국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데이릭을 주시했다.

    “나, 정말로 같이 다녀도 돼?”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해?”

    뭔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데이릭에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재수 없는 아이인데.”

    “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데이릭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엄마도 나 때문에 죽었다고 아빠가 그랬어. 그리고 아빠도……. 모두가 내 곁에 있으면 죽고 불행해져. 내 곁에 있으면 불행해지는 게 숙명이래, 그 녀석들이. 그러니 아마 너희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데도 나한테 밥을 사 주겠다고? ……아니지? 이제 다 알았으니 재수 없다고 침 뱉고 떠날 거지?”

    “…….”

    나는 차마 데이릭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 될 빈민가 출신의 아이라는 것만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 데이릭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전혀 몰랐다.

    “야.”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하는 사이에 제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이릭은 나에게 주었던 시선을 돌려 제프리를 확인했다.

    “난 말이야, 나 때문에 부모님이 돈을 빌렸다가 돌아가셨어. 그럼 나도 재수가 없는 거야?”

    “그건…….”

    제프리의 말에 데이릭이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그런 생각하지 마.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생각밖에 못 하게 돼.”

    마치 경험해 본 듯 제프리는 담담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밝고 즐거운 생각만 하라는 게 아니야. 당연히 싫은 생각, 안 좋은 생각 다 올라와. 근데 거기 빠지진 마.”

    열한 살짜리 아이의 말이었음에도 나는 그가 열한 살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불행 때문일까? 그는 생각이 정말 깊은 것 같았다.

    데이릭도 제프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넌 정말 내가 재수 없는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

    “야. 됐으니까 같이 놀기 싫으면 싫다고 해. 좋으면 좋다고 하고.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마. 짜증 나니까.”

    제프리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똑 부러졌다.

    데이릭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같이 다녀도 될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나는 제프리의 굳은 옆모습을 한번 살핀 후 이내 데이릭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너만 싫지 않으면.”

    그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서 웃었다. 그러자 데이릭이 무언가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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