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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2)화 (82/174)
  • 82화

    놀라운 사실에 눈을 크게 뜬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하마터면 악룡이니 크립소니 하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좋았다.

    게다가 이 말을 해서 데이릭이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더욱 문제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데이릭이 제프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지?

    “주머니만 돌려주면 보내 준다고 했잖아.”

    “…….”

    제프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데이릭의 손목을 쥐고 말했다. 데이릭은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빼려고 노력했지만, 제프리가 놓아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

    데이릭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프리마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정말로 주머니만 돌려주면 보내 줄 거야?”

    혹시라도 제프리가 헛다리를 짚은 거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실제로 데이릭이 제프리의 주머니를 훔쳐간 게 맞는 듯했다.

    “난 한 번 한 약속은 지켜. 날 화나게 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갚는 편이고.”

    제프리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데이릭은 고민하는 듯 제프리를 노려보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알겠어. 이 이상으로 소란이 커져서 경비대라도 몰리면 안 되니까…….”

    투덜거리듯 중얼거린 데이릭이 자유로운 손으로 품을 뒤졌다. 왼손으로 왼쪽 품을 뒤지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소요되었지만, 어쨌든 그는 제프리에게 주머니를 되돌려 주었다.

    “미라벨, 괜찮으면 이 녀석 잡고 있을래? 내용물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데 손이 부족해서.”

    “응, 알았어.”

    제프리가 곤란해하며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데이릭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잡기도 전에 어른의 손이 데이릭을 잡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펠릭스의 손이었다.

    “작은 아가씨께서 이런 자를 만지게 둘 수는 없습니다.”

    펠릭스는 내가 소매치기인 데이릭과 접촉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자신이 제프리를 대신하여 데이릭을 잡아두었다.

    제프리는 흘긋 펠릭스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금화 몇 개, 은화 몇 개와 자잘해 보이는 물건들, 그리고 손수건으로 잘 감싼 무언가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제프리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손수건에 싸인 물건을 확인했다.

    조심스럽게 풀어낸 손수건 안에는 크라이튼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커프스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제프리가 크라이튼 대공가를 찾아왔을 때 크라이튼 대공이 제프리에게 선물했던 물건이었다.

    “다행이다. 그대로네.”

    제프리는 커프스가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간직하고 있구나.”

    “응. 은인이 주신 선물인걸.”

    “은인?”

    뜻밖의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제프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응. 은인.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있을 수 있는 건 다 너와 크라이튼 대공님 덕분이잖아. 그러니 은인이지.”

    밝게 대답한 제프리는 다시금 커프스를 손수건으로 잘 감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렇게까지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응.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이렇게 해 뒀어. 근데 아까 저 녀석이랑 부딪쳤는데, 저 녀석이 간 크게도 내 품에서 주머니를 훔치더라고.”

    제프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릭을 노려보았다.

    데이릭은 자신이 한 일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지 제프리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린 채 딴짓을 하는 흉내를 내었다.

    그러다가 제프리가 시선을 회수하니 슬쩍 곁눈질로 제프리의 눈치를 봤다.

    나는 데이릭에게서 신경을 끄고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찾아서 다행이다.”

    내가 제프리에게 말하자 제프리가 말없이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거 잃어버렸다고 무모한 행동하면 안 돼. 할아버지께서 그러라고 준 거 아니니까.”

    “응?”

    내가 걱정을 담아 이야기하자 제프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했다.

    “만약 다음에 도둑맞게 되면 훔친 상대와 싸우지 말고 날 찾아와. 그럼 내가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하나 구해 줄 테니까.”

    상대가 데이릭이었기에망정이지, 만일 위험한 사람이었다면 제프리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데이릭도 사실은 위험한 상대였다.

    왜 그가 지금은 악룡 크립소의 힘을 사용해서 도망가지 않았나 하는 것은 의문이었지만, 만일 데이릭이 제프리를 공격하고자 마음 먹었다면, 제프리는 지금쯤 아주 큰 부상을 당하거나, 아니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커프스 같은 건 크라이튼 대공에게 부탁한다면 또다시 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목숨은 한 번 잃으면 끝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래. 나한테 일부러 선물해 주신 건데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 거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내가 쟤한테 질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제프리가 턱짓으로 데이릭을 가리켰다.

    물론 체격이 더 크기 때문에 순수하게 힘만 놓고 보면 제프리가 데이릭을 이기는 게 당연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건 데이릭이 제프리가 생각하는 그런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조심해. 알았지?”

    내가 대답을 종용하자 제프리가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할게.”

    제프리가 주머니를 모두 챙기는 것을 확인하고 데이릭에게로 다가갔다.

    데이릭은 마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멀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나?

    짧게 생각하다가 이내 내가 데이릭과 만났을 때는 마법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모습을 숨긴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데이릭이 나를 보고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마침 비브르는 다니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따라나섰으니 나를 알아볼 증거가 없어 못 알아보는 게 더더욱 당연했다.

    “저기요, 물건 맞아요. 그러니까 이제 풀어 주셔도 돼요.”

    제프리가 데이릭을 잡고 있는 펠릭스를 향해 말했다. 펠릭스가 그 소리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풀어줘도 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잠깐만, 펠릭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펠릭스가 데이릭을 풀어 주는 상황을 막았다. 그러고는 데이릭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데이릭 모어가 확실했다. 하지만 뭔가가 조금 다른 듯했다.

    나는 잠시 데이릭을 빤히 주시했다. 그러다가 왜 데이릭이 아직까지 수도를 활보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데이릭의 정확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들은 몇 없었다.

    우선 지하실에서 그를 구했던 인물. 나와 라이넬 사제, 성기사 베트람. 그 셋과 신전에서 그를 보았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데이릭을 남색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한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데이릭의 눈동자는 금색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어? 뭐?”

    지금의 데이릭은 보라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지하실에서 데이릭을 보았을 때와 같은 눈동자 색이었다.

    지하실을 나오고 나서 보았던 금색의 눈동자는 대체 뭐였을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당장은 데이릭에게 알은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기는 해도 일단 확인을 하기는 해야 했으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뭐?”

    데이릭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데이릭을 향해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미라벨이야. 네 이름은 뭐야?”

    “내 이름은 데이…….”

    데이릭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다가 문득 입을 꾹 닫았다.

    아마도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조심하는 듯했다.

    “이름이 데이야?”

    우리 사이에 끼어든 것은 에이드리안이었다.

    “뭐? 아니, 그건 아닌데……. 근데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데이릭은 당황스러워하며 횡설수설했다.

    “이름이 데이가 아니야? 그럼 뭔데? 방금 미라벨이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데이라고 했잖아. 이름에 데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천진한 얼굴로 물어보는 에이드리안의 물음표 공격에 데이릭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주변에 뭐가 있어?”

    에이드리안 역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데이릭이 주변을 살피는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그를 쫓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런 듯했다.

    아직 다니엘은 데이릭이 사라진 것을 모르고 있을 테니 쫓고 있는 세력이 없었지만, 데이릭이 그것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다니엘과 신전이 자신을 쫓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난…… 나는 주머니 줬으니까 이제 풀어 줘.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불안한 듯이 사람들을 훑은 데이릭이 제프리를 향해 말했다.

    제프리는 뺨을 긁적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풀어 주라고 했어. 그런데 미라벨이 너한테 볼일이 있나 봐.”

    제프리는 난처한 듯이 중얼거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데이릭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내가 펠릭스를 저지해 버렸으니 제프리로서도 어쩔 수 없어 한 대답이었다.

    제프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려고? 난 주머니 받아서 이제 괜찮은데.”

    “잠깐만 기다려 줘.”

    “……난 뭐. 상관없어.”

    내가 부탁하자 제프리가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뭔가 곤란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본명은 묻지 않을게.”

    사실 이름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데이릭에게 말했다.

    데이릭은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부를 이름이 필요하긴 하니까 일단 데이라고 부를게.”

    “무슨 용건인데 그래?”

    “별거는 아니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지만, 데이릭은 별거 아니라는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런 데이릭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루, 우리랑 같이 다니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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