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1)화 (81/174)

81화

“이번에는 내가 해 볼게!”

“네!”

에이드리안이 주장하자 레버를 돌렸던 아니타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오르골 소리와 새들의 움직임이 반복되는 것을 나란히 서서 구경하다가 멜로디가 멎고 움직임이 그치니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 또다시 레버를 돌렸다.

어지간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적당히 하다가 흥미가 식지 않을까 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두 사람은 이 장식물을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듯했다.

조금 지루하게 여기면 바로 움직일 예정이었는데 두 사람은 도통 지루해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여정이 고급 상점가의 입구로 끝이 날 것 같아서 가볍게 손뼉을 쳐 아니타와 에이드리안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내가 손뼉을 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호기심을 담은 두 쌍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제 이동해 볼까요?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내가 말하자 에이드리안과 아니타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장식품을 두고 떠나기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미라벨, 조금만 더 보면 안 될까? 이번에 아니타 차례인걸.”

에이드리안이 배려하는 건지 아니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아니타를 바라보자 아니타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는 괜찮아요. 작은 아가씨께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돼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아니타가 흘끔거리며 장식품을 한번 쳐다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아니타가 마지막으로 돌리고 떠나자.”

“그래도 되나요?”

아니타가 희망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신 한 번만이야. 다 끝나면 떠날 거야.”

“네!”

아니타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얼른 돌려.”

“네, 작은 아가씨.”

아니타가 레버를 조심스럽게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아니타와 에이드리안이 몇 번 돌렸기 때문인지 처음과는 달리 부드럽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타가 레버를 돌릴 만큼 돌리고 난 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장식품이 움직이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멜로디와 움직임이 멎고, 에이드리안과 아니타가 아쉬움을 뒤로 하며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다 봤어.”

“저도요.”

나는 두 사람의 아쉬움을 달래듯 양손을 뻗어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려 주었다.

“구경할 게 아직 많아요. 그러니까 이동한다고 상심하지 말고 따라와요. 신기한 게 앞으로도 많은데 여기서 하루를 다 보내면 너무 아깝잖아요. 안 그래, 아니타?”

“네. 맞아요.”

내가 아니타를 향해 확인을 구하자, 아니타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행히도 에이드리안 역시 내 말에 수긍하며 나를 따랐다.

더 투정 안 부리고 순순히 말을 듣고 따라오는 아니타와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고 골목을 걸었다.

고급 상점가를 택한 건 길목에 구경할 게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생각이 잘 들어맞았던 것 같았다.

한 블록을 넘어갈 때마다 보이는 장식물에 두 아이들이 정신을 팔고 구경하는 모습이 뿌듯했다.

처음에 엘리엇의 제안을 받아 가볍게 산책을 겸해서 외출한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산책이 될 것 같았다.

쭉 고급 상점가를 돌아본 후에는 시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아이들의 눈을 홀릴 만한 장난감들도 있었고. 또 맛있는 요리들도 있으니 에이드리안이나 아니타를 데리고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난 역시 처음에 봤던 그 새 모양 장식품이 제일 좋았어.”

“저도요! 노랫소리도 정말 좋았고, 작은 새들이 움직이는 게 꼭 진짜 같아서 정말 좋았어요.”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 부탁드려서 황성에도 하나 설치하자고 할까 봐.”

“우와. 좋으시겠어요.”

에이드리안과 아니타는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 덕분인지 제법 말도 잘 통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이런 신기한 문물은 거의 접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오늘 하루 구경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공유할 수 있어서 서로가 좋은 대화 상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다 만들게 되면 내가 꼭 미라벨도, 아니타 너도 초대해 줄게. 그럼 와서 같이 구경하면 되잖아.”

“정말 저도 초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미라벨의 하녀면 충분히 자격이 되지. 참, 기왕이면 제프리도 초대하면 좋겠다.”

“제프리라면 작은 아가씨의 친구 말씀하시는 거죠?”

“응. 내 친구이기도 해.”

대화의 주제가 어느새 제프리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제프리도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았다.

제프리가 나보다도 나이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였으니 충분히 그럴 것 같았다.

나중에 제프리가 오게 되면 한번 데리고 와야 하나 고민을 할 때쯤이었다.

“이거 놔!”

“못 놔! 네가 훔쳐 간 주머니 돌려주기 전까진 나도 안 놓는다고 말했을 텐데?”

시장의 입구로 막 들어서려는데 안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저기서 무슨 소란이 났나 봐.”

“정말요. 싸우는 소리가 나요.”

에이드리안과 아니타가 마치 맞춘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 나온 가솔들이 있었으니 내가 두 사람의 통솔자는 아니었지만, 둘은 이미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게. 무슨 일이지?”

하지만 나 역시도 소란의 내용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나 아니타, 에이드리안은 아직 나이가 어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안에서 무슨 소란이 인 건지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다행이라면 대화의 내용으로 그나마 무슨 상황인지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놓는다’거나 ‘훔쳐 갔다’는 말이 오가는 것으로 봐서 누군가가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모양이었다.

“주머니 내가 안 가져갔다고!”

“웃기지 마. 내가 다 봤단 말이야. 네가 내 품에서 주머니 훔쳐 가는 거.”

그런데 기묘하게 두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펠릭스, 길을 좀 열어 줄래?”

나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우리를 엄호하며 따라오던 기사 펠릭스를 향해 부탁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난처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작은 아가씨께서 궁금해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만, 이런 분쟁을 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외람된 말씀이지만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펠릭스가 나에게 제안했다.

확실히 내가 평범한 성인이고, 내가 돌보는 아이들이 이런 광경을 구경하겠다고 하면 말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싸움 난 걸 구경시켜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모시는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 없이 곧이곧대로 따르기만 하는 사람들보다 펠릭스처럼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이해는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싸움을 구경하고 싶어서 길을 열어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해서 그래. 확인하고 싶으니까 길을 좀 열어 줘.”

“예? 목소리가 익숙하단 말입니까?”

“응. 아는 사람인 것 같아.”

내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펠릭스가 갈등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에이드리안이 말을 얹었다.

“어? 진짜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거봐. 펠릭스, 나만 아는 게 아니잖아. ……해 줄 거지?”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에이드리안을 증인으로 내세우자 펠리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잘 따라와 주십시오.”

펠릭스가 우리들의 앞으로 나섰다.

“잠시만 비켜 주십시오.”

펠릭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길을 만들었다.

기사인 그는 워낙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기 때문에 뭔가 싶어서 돌아보았던 사람들은 펠릭스의 덩치에 기가 죽어 옆으로 한 걸음씩 비켜 주었다.

편안히 펠릭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소란이 이는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은색 머리를 한 소년과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작은 아이가 실랑이질을 하고 있었다.

“네가 훔쳐 간 그 주머니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알아?”

은발의 소년이 로브를 뒤집어쓴 아이에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정말로 크게 화가 난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반면 로브를 입은 아이는 필사적으로 로브가 벗겨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로브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제프리?”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 뒤를 따라온 에이드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은발 소년을 불렀다.

“누가 내 이름을……!”

그제야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은발 소년, 제프리가 그대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상황 파악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지 그대로 멈추어 있던 제프리가 뒤늦게 이지러트렸던 얼굴을 환하게 폈다.

“너희……!”

“이거 놔!”

“으악!”

우리를 알아본 제프리의 손에 잠시 힘이 풀렸는지 로브를 뒤집어쓴 아이가 제프리를 밀쳤다.

그 탓에 제프리는 그 아이와 함께 볼썽사나운 모양으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제프리! 괜찮아?”

“제프리~!”

나는 황급히 제프리를 향해 다가갔다. 에이드리안 역시 제프리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

“아으, 엉덩이 아파.”

금세 상체를 일으킨 제프리가 손을 들어 엉덩이를 받치고 일어났다.

“너희 잠시만 기다려.”

“어? 어, 응.”

“알겠어!”

우리를 잠시 확인한 제프리가 자신과 똑같이 넘어진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아이도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아이의 얼굴과 남색 머리칼이 잠시 허공에 노출되었다.

“……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제프리가 아이를 향해 다가가 다시 주머니를 내놓으라고 따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 아이를 대체 언제 봤던 건지 떠올리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바로 데이릭 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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