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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80)화 (80/174)

80화

“에이드리안, 너도 갈아입는 게 좋지 않겠어?”

문을 닫고 에이드리안을 향해 제안했다.

에이드리안이 입고 있는 옷은 어디를 봐도 본인이 황태자라고 광고를 하는 듯 황실의 제복이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어디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정수리만 보다가 돌아오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옷을 따로 가져오지 않았는걸? 그렇다고 너한테 옷을 빌릴 수도 없잖아.”

에이드리안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내 옷을 빌리기에는 에이드리안의 체형이 나와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 저택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빠가 어릴 때 입었던 옷을 빌리면 되지 않을까?”

“오빠? 엘리엇?”

“응. 엘리엇이 어릴 때 입던 옷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물어볼게.”

“응!”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펴졌다.

나는 다시 응접실 문을 열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칼리나, 혹시 엘리엇이 더 어릴 때 입던 옷을 좀 빌릴 수 있을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칼리나가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바깥에는 달리아를 위시한 에이드리안의 수행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옷을 빌려 갈아입는 중인 듯했다.

결국 복도에 남은 것은 아니타 혼자뿐이었다. 바깥에 혼자 세워 두기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니타를 향해 제안했다.

“아니타, 밖에서 기다리기 힘들 테니 너도 안으로 들어올래?”

“네? 제가 어떻게 작은 아가씨와 황태자 전하께서 계신 곳에 들어갈 수가 있겠어요.”

화들짝 놀라서 대답하는 아니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조용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거기서 대기하고 있으면 다리 아프잖아.”

“그렇지만…….”

“얼른.”

나는 일부러 아니타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니타는 차마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너는 이름이 뭐야?”

에이드리안은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아니타에게 물었다.

“아니타 리오펠입니다.”

아니타가 에이드리안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살이야?”

“여덟 살이에요.”

“너도 나보다 한 살 많구나.”

손가락을 들어 셈한 에이드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제일 나이가 어리다는 게 불만인 듯한 표정이었다.

“작은 아가씨, 옷이 남아 있습니다. 방금 도련님께도 확인하고 오는 길이에요. 갈아입으시면 될 거 같아요.”

그사이에 돌아온 칼리나가 내게 보고했다.

에이드리안 혼자 갈아입을 수는 없을 테니 달리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달리아가 돌아왔다.

“달리아, 황태자 전하의 옷도 환복했으면 하는데. 엘리엇의 옷을 준비해놨으니 그걸로 갈아입혀 줄래?”

“예, 그리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잠시 저를 따라오십시오.”

“응.”

에이드리안이 달리아의 부름에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것을 확인했다.

“참, 그리고 다 되면 현관 앞으로 나와. 거기 있을 테니까.”

“네, 소공녀님.”

에이드리안과 달리아가 다른 하녀의 안내를 따라 사라지고, 나는 고개를 돌려 아니타를 돌아보았다.

“가자”

“네, 작은 아가씨.”

몇몇 인원을 대동한 채 계단을 내려가 1층의 현관을 향했다.

긴 정원을 지나야 할 테지만, 크라이튼 대공가의 정문은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계획했던 것처럼 오늘은 아니타랑 칼리나, 그리고 기사인 펠릭스만 갈 거야.”

아니타와 칼리나, 그리고 외출을 위해 대동한 기사 펠릭스는 이미 외출복을 입은 상태였다.

“네, 작은 아가씨.”

“성실히 엄호해 드리겠습니다.”

칼리나와 펠릭스가 대답했고, 아니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타를 슬쩍 바라보니 기대감에 가득한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타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대공가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으니 외출을 위해 바깥으로 나가 본 일은 적은 탓일 것이었다.

이렇게 들뜨는 모습을 보니 진작 데리고 나올 것을, 하는 후회도 들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에이드리안이 현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드리안은 평소의 정복과 달리 가벼운 셔츠에 까만 바지 차림이었다. 항상 정복 차림에 경직되어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편안한 모습을 보니 또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미라벨! 어때? 잘 어울려?”

에이드리안이 내 앞에 와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았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잘 어울려요.”

“진짜?”

내가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자 에이드리안이 천진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 볼까요? 지금보다 더 늦으면 구경할 시간도 없을 거 같아요.”

“응. 가자!”

에이드리안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대동하고 저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녀오세요, 작은 아가씨.”

한참 밖으로 나가니 마침내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나오니 수도의 활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처음 외출을 생각할 때는 편안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돌아다니는 것을 생각했는데, 에이드리안이 함께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뒤따르는 수행인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에이드리안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일단 좀 둘러보실래요?”

에이드리안을 향해 제안하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에이드리안을 이끌고 먼저 고급 상점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와! 저건 뭐야?”

에이드리안이 상점가 중앙로에 설치된 아기자기한 장식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무래도 고급 상점가는 찾는 사람들의 눈 호강을 위해서 이곳저곳에 구경할 만한 장식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중에서도 분수에서 노니는 새들을 표현한 장식품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나는 에이드리안을 그 앞으로 데려갔다.

이 장식품은 내가 기억하기로 시계 장인이 만든 섬세한 장식품으로, 옆에 있는 태엽을 감아 주면 움직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신기한 거 보여 드릴까요?”

“응!”

에이드리안을 향해 묻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의 대답을 들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자 아니타 역시 눈을 빛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타, 잠시만 이리로 와 볼래?”

“네? 저요?”

자신이 불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타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가리켰다.

“응. 이리 와 봐.”

“네, 네…….”

아니타는 에이드리안과 다른 수행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런 아니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니타는 그런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 좀 줘 볼래?”

“네.”

아니타는 영문도 모르고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나는 그런 아니타를 이끌어 장식품 옆에 나 있는 작은 레버 위에 아니타의 손을 얹었다.

“이거 돌려 봐.”

“네, 작은 아가씨.”

아니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레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린 아니타의 힘으로는 조금 뻑뻑하게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돌려야 할까요?”

아니타가 레버를 계속해서 돌리며 내게 물었다.

“이제 됐어.”

“네!”

아니타가 손을 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태엽이 돌아가는 섬세한 소리가 들리고 곧 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숙였던 참새는 몸을 일으키며 부리를 털었고, 어떤 새는 접혔던 날개를 펴 날개를 정리하듯 움직였으며, 그 외의 새들은 이리저리 정해진 구역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낡은 오르골 소리가 울렸다.

“우와…….”

“정말 예뻐요!”

에이드리안과 아니타가 함께 감탄을 터트렸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바라보는 게 정말 뿌듯했다.

새들의 움직임과 오르골 소리는 오래 가지 않아 그치고 말았다.

태엽을 충분히 감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해 볼래!”

금세 끝나 버린 것에 실망하던 에이드리안이 직접 레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검술을 훈련한 덕인지 에이드리안은 아니타와 달리 훨씬 많이, 더 빠르게 태엽을 감을 수 있었다.

마침내 에이드리안이 열심히 태엽을 돌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새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달콤한 오르골 소리가 상점가를 울렸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장식품이 움직이는 게 신기한지 먼발치에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미라벨, 너는 이거 어떻게 알았어?”

에이드리안이 발그레 물든 얼굴을 한 채 나를 돌아보았다.

“전…… 대공가로 오기 전에 우연히 알게 됐어요.”

차마 과거로 회귀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태엽을 감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은 대충 둘러댔다.

모두 내가 대공가로 오기 전에 정확히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모르기 때문에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은 없는 듯했다.

“그래? 신기하다. 난 이렇게 움직이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에이드리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에이드리안을 마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처음에 봤을 때는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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