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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9)화 (79/174)
  • 79화

    데이릭의 도주로 인하여 한동안 신전을 방문하여 신력을 수련하던 오후 일정에 공백이 생겼다.

    데이릭을 잡기 전까지는 한동안 듀아나 신전으로 걸음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전 내부가 비상사태일 테니 내가 가면 오히려 더욱 신경 쓰이기만 할 터였다.

    내가 가더라도 나를 가르칠 라이넬 사제가 바쁠 테니까 가서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신전에 갈 일도 없고, 또 다니엘이 데이릭의 실종을 언제 알아차리고 어떤 대처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에 비브르에게 다니엘을 미행해 달라 부탁해 놓았다.

    다행히도 비브르에게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다니엘은 데이릭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니엘이 알아차리기 전에 듀아나 신전에서 먼저 데이릭을 찾아야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최대한 다니엘이 늦게 알아차리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며 오후에 뭘 해야 하나 싶어서 잠시 고민했다.

    과거로 돌아와서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내다가 오후에 시간이 넘게 되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차라리 검술 훈련이나 체력을 단련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데이릭을 다니엘의 손아귀에서 구해냄으로써 앞으로 있을 일이 많이 수월해질 거라고 생각했건만, 정작 그 데이릭이 신전에서 도주해 버리는 바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게다가 추측이 맞는다면 데이릭은 악룡의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존재가 외부로 떠나갔으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좀 더 대비를 해 두어야 할 터였다.

    만약 데이릭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다니엘이 데이릭을 다시 찾아낸다면 그의 계획이 좀 더 빠르게 단축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다니엘과 엮이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데이릭이 스스로 악룡의 봉인을 깨 버릴 수도 있겠지.

    괜히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벨, 생각이 많아 보이네?”

    모처럼 점심 식사를 같이한 엘리엇이 물로 입을 축이며 내게 물었다.

    “으응. 모처럼 한가해지니까 생각이 좀 많아지나 봐.”

    “하긴. 내가 보기에도 너 너무 열심히 했어. 조금은 쉬어가면서 해 줘야 몸도, 정신도 재충전을 하는 거야. 오늘 같은 날은 편하게 쉬어.”

    엘리엇은 정말 나를 걱정해 주는 든든한 오빠처럼 말했다.

    사실 그게 맞았다. 엘리엇은 나보다 세 살 많았고, 또 가족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오빠가 진짜 오빠 같아서.”

    “가짜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장난기를 가득 담아 하는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할 거 없으면 밖에 나가 봐. 그동안 여기 와서 한 번도 제대로 구경해 본 적 없잖아.”

    “……그럴까?”

    엘리엇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언제나 여유 없이 살았던 용병일 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그러니 그때 내가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들을 지금은 여유롭게 구경하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이틀 정도는 그렇게 돌아다녀도 될 것 같았기에 수긍했다.

    “그래 봐야겠다. 고마워, 오빠.”

    “응? 아, 으응.”

    막 케이크를 한 입 먹으려던 엘리엇이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엘리엇과 식사를 마친 후 외출하기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화려한 드레스는 아무래도 편안히 관광을 하기에 좋은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원피스를 골랐다.

    지금 입은 원피스는 일전에 황성으로 가기 전 크라이튼 대공이 나를 위해 선물해 준 옷 중 하나였다.

    확실히 가볍고 부드러운 소재로 되어 있어서 돌아다니기 편했다.

    똑똑, 그때 파우더룸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아가씨,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연락도 없이?”

    당황해서 칼리나가 머리를 손질해주는 와중임에도 고개를 돌려 문을 확인했다.

    “금방 나간다고 전해 줘.”

    “네, 작은 아가씨.”

    아니타가 문으로 다가가 바깥에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뒤늦게 다시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칼리나의 손에 내 머리를 맡겼다.

    이번에는 하나로 곱게 땋아 준 칼리나가 내 머리에 커다란 꽃 모양 장식을 달아 주었다.

    “다 됐습니다, 작은 아가씨.”

    “오늘도 예쁘게 해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께서 워낙 예쁘시니까 어떤 스타일을 해도 잘 어울리시는걸요. 저도 하면서 즐거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빨리 가자.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실라.”

    “네.”

    자리에서 일어나 파우더룸을 나왔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녀를 향해 물었다.

    “응접실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응. 부탁해.”

    하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문 앞에 도착하자 하녀가 문을 두드려 주었다.

    “크라이튼 소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녀는 말을 마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에이드리안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앉아 계시지 그러셨어요.”

    “앉아 있었어. 그리고 미라벨, 우리 다른 사람 없을 때는 반말하기로 했잖아.”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런 약속을 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알겠어. 이제 됐지?”

    “응!”

    해맑게 웃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서 오늘 왜 갑자기 온 거야? 찾아오기 전에 연락 달라고 했잖아.”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고 소파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오늘부터 네가 오후에 쉰다고 하길래 다른 공부들 다 미루고 찾아왔어. 넌 항상 공부하느라 바빠서 같이 놀기 힘들잖아.”

    소파에 앉은 에이드리안이 서운함을 토로했다.

    나는 그래도 에이드리안이 온다고 하면 최대한 일정을 비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에이드리안은 그것도 서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쉰다는 얘기 듣고 온 거야?”

    “응. 같이 놀고 싶어서. 안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너랑 놀 때는 언제든 공부를 미뤄도 된다고 했는걸?”

    “황제 폐하께서?”

    “응. 우린 친구니까 그래도 된대. 하지만 네가 괜찮다고 할 때만.”

    “…….”

    천진하게 웃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내게 허락을 미리 받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알겠어. 안 그래도 오늘 휴식할 겸 바깥에 산책을 나가려 했는데 괜찮으면 같이 나갈래?”

    “헉.”

    에이드리안에게 제안하자 그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아 놀란 듯했다.

    “왜 그래?”

    에이드리안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자 에이드리안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드러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밖에 나가도 돼? 나도?”

    “안…… 되는 거야?”

    생각해보니 에이드리안과 함께 나가려면 허락을 따로 받아야 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해다.

    “그럼 오늘은 그냥 실내에서 놀까?”

    어차피 시간이 좀 남으니 오늘은 저택에서 에이드리안과 보내고, 다른 날에 혼자 외출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나 나가고 싶어. 맨날 황성에만 있는 건 싫은걸. 나도 밖에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이미 외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에이드리안은 흥분한 상태로 내가 가자고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럼 수행하는 사람들한테 확인해 보고 괜찮으면 그렇게 하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알았지?”

    “응!”

    에이드리안이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응접실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직접 문을 열어 머리만 빼꼼 밖으로 내밀었다.

    “있지, 이름이 달리아라고 했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이드리안의 시녀를 불렀다. 30대 중반의 시녀였는데, 에이드리안이 어려서부터 그의 시중을 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예, 크라이튼 소공녀님.”

    “다른 게 아니라 오늘 내가 밖으로 외출할 예정이었는데 황태자 전하도 같이 외출해도 될까? 위험하면 거절해도 돼.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거니까.”

    내가 차분히 묻자 달리아가 잠시 망설이며 응접실 안쪽을 확인했다. 에이드리안이 있는 방향이었다.

    “결정하기 어려우면 됐어. 다음에 가면 되니까.”

    “앗! 안 되는데!”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달리아의 모습에 괜히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건 아닌가 싶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뒤에서 에이드리안이 애처롭게 외쳤다.

    “아닙니다, 소공녀님. 소공녀님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네.”

    달리아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긍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잠시 망설였지만, 특별한 문제가 있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좀 할게. 그리고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은데 따라올 거면 옷을 좀 갈아입는 게 좋지 않을까? 옷은 필요하면 우리 저택에서 제공해 줄 거야.”

    바깥에서 가솔들을 이끌고 다니는 티를 내면 결국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만 못한 것 같아서 달리아를 향해 말했다.

    “예,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외람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응.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준비해.”

    달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현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정면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그는 눈물로 일렁거리는 눈을 나한테 고정한 채 거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나, 너무 감동받았어…….”

    왜 그러나 싶은 찰나에 에이드리안이 눈에 맺힌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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