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내가 듀아나 신전 보육원에 오게 된 이유가 바로 데이릭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뜬금없이 린제이 사제의 습격을 받게 되어 소란을 한차례 겪게 되었다.
어쨌든 강제로 악룡 크립소의 힘에 지배당하는 자들에게 대적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그건 나름대로 수확이기는 했지만, 정작 내가 만나려고 했던 데이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데려오신다고 하셨는데 안 보여서요. 혹시…….”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플레온 사제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다들 데이릭이라는 소년을 찾아보십시오. 남색 머리칼에 금색 눈동자를 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어서요!”
뒤늦게 주위를 둘러본 플레온 사제가 황급히 주변으로 모여든 성기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성기사들은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지며 데이릭을 찾기 시작했다.
플레온 사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꽤 흘러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우선 데이릭을 찾는 일이 급선무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어요.”
플레온 사제는 황급히 걸음을 옮겨 우리가 왔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플레온 사제를 따라 빠르게 신전의 본 건물로 향했다.
플레온 사제는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섰다. 나 역시 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왔다. 아까 전까지 이곳에 다른 사제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왜 이곳으로 온 건가 싶었는데, 플레온 사제는 곧바로 회의장 전면으로 향하더니 그곳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전 전체에 짧게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머지않아 대사제들이 하나둘씩 안으로 모여드는 것을 확인하며, 그 버튼이 대사제들을 부르는 긴급 호출 버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바론 대주교가 안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찾았다.
플레온 사제는 대사제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하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데이릭 모어가 사라졌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조금 전까지 플레온 사제님께서 성녀님과 함께 데이릭 모어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실종 역시 제 불찰입니다.”
플레온 사제는 침중한 음색으로 시인했다.
“자세히 설명해 보십시오.”
대사제 중 한 명이 답답한 마음에 플레온 사제를 다그쳤다.
“저 때문이에요.”
나는 플레온을 대신하여 대사제들 앞에 나섰다.
“조금 전 제가 보육원 상담실에 들어갔는데, 보육원을 담당하는 사제 한 분이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한번 대치가 있었고, 플레온 사제님은 저를 돕느라 데이릭 모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제가 그 사제님을 악룡의 지배에서 푸는 사이에, 데이릭 모어가 도망친 것으로 추정돼요.”
“사제 중에 악룡 크립소의 지배를 받는 자가 있었다고요?”
내 말에 회의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네. 비브르가 말해 주었고, 또 플레온 사제님이 알려 준 방법으로 풀어냈으니 분명한 사실이에요. 아마도 데이릭 모어가 보육원에 들어가며 사제님께 수를 부린 것 같았어요.”
“허, 그런…….”
회의장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비상 회의를 소집한 거군요.”
바론 대주교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온은 죄책감 어린 얼굴로 바론 대주교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플레온. 성녀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예.”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그렇게 쉽게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일단 근처에 모였던 성기사들에게 그 아이를 찾으라 했지만, 찾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무엇보다 데이릭 모어가 악룡 크립소의 힘을 사용하였으니까요.”
플레온이 짧게 한숨을 내쉰 후에 모두를 향해 얘기했다.
“근데 데이릭 모어가 스스로 그런 계획을 세워서 나갔던 걸까요?”
문득 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혹시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닌지…….”
내가 본 데이릭은 내 또래의 아이로 보였다. 기껏해야 나보다 두세 살 정도가 많을까?
그런 데이릭이 린제이 사제님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시간을 벌어 탈출까지 도모할 생각을 했다고?
나처럼 미래에서 돌아온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열 살 정도 된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도통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글쎄요. 만일 데이릭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 거라면 더욱 힘든 상황이 되겠군요.”
라이넬 사제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듯 그를 바라보자 라이넬 사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데이릭의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자가 우리의 행동을 이미 예측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요?”
“성녀님께서 비브르 님께 부탁해 다니엘을 미행하게 한 것, 미행한 곳에서 악룡 크립소의 씨앗을 발견한 것, 회의 끝에 아이를 구출하기로 결정된 것까지 예측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죠. 데이릭은 비브르 님을 본 순간, 우리가 습격할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함정을 파 두었습니다.”
라이넬 사제의 말에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비브르를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해서 차마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데이릭은 비브르가 찾아온 것만 보고 우리가 습격할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대가로 우리의 습격 정보를 알렸고, 그 덕에 감옥을 지키는 이들이 우리를 잡을 함정을 파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릭은 거기서 자유를 얻지 못했죠. 그리하여 다음 계획으로 넘어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라이넬 사제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었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데이릭을 탈출시킬 수 있도록 누군가가 판을 짜 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미리 짜 두지 않았다면 오히려 황당할 정도로 딱 맞는 순간들만 찾아왔다.
생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왜 라이넬 사제가 데이릭의 뒤에 다른 존재가 있으면 더욱 힘들어질 거라고 예상하는지 뒤늦게 이해가 갔다.
내 생각을 이미 꿰뚫고 있었고, 또한 우리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럼 일단 상황은 파악이 되었으니 데이릭 모어를 찾는 것에 주력해야겠군요.”
“예. 만약에 데이릭 모어가 다시 다니엘과 접촉한다면 곤란하니까요.”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있다면 모두 동원해서 데이릭 모어를 찾아 보도록 하죠.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멀리까지는 가지 못했을 겁니다.”
“예.”
“그리고 성녀님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신전에 걸음 하지 마십시오. 위험할지도 모르니까요.”
바론 대주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알겠어요. 그럼 괜찮을 때 연락 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볼게요.”
푸근히 웃는 바론 대주교를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라이넬 사제조차도 데이릭을 찾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나를 배웅하지 못했다.
익숙하게 복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뒷문을 통해 수련장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문으로 나왔다.
“작은 아가씨?”
“어? 벌써 나오셨어요?”
내가 밖으로 나오자 복도에 마련된 벤치에서 아니타에게 수를 가르쳐 주던 칼리나와 열심히 바늘을 움직이는 아니타가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했다.
“응. 신전에 일이 좀 있나 봐. 그래서 일찍 마치고 나왔어.”
“무슨 일이기에 수련까지 못 하신 거예요?”
아니타가 토끼 같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귀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라이넬 사제님이 바쁘셔서 한동안은 수련도 힘들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일단 가자. 모처럼 일찍 끝났는데 돌아가서 편히 쉬자.”
“예, 작은 아가씨.”
“좋아요!”
칼리나와 아니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대동한 채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마차로 향했다.
내가 순순히 바론 대주교의 말대로 저택으로 돌아가길 선택한 것은 칼리나와 아니타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신전을 찾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신전을 벗어나는 동안 데이릭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신전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데이릭이 이런 깊숙한 곳을 거쳐 나가지는 않을 테니까.
“작은 아가씨,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내가 경계하며 걷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건지 칼리나가 내게 물었다.
“응? 아니, 괜찮은데? 왜?”
“아니라면 다행이에요.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긴장하신 것 같아서요. 혹시 어디 불편하신가 싶어서 여쭤봤어요.”
“으응. 괜찮아. 아프면 말할 거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네.”
나는 칼리나에게 웃어 보인 후 곧장 마차를 호출하여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