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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5)화 (75/174)
  • 75화

    다음날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다니엘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 비브르가 일주일이나 다니엘을 미행했을 당시에도 빈민가를 찾은 것은 단 하루뿐이었으니, 평소에는 그곳을 찾지 않아 아직 정보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는, 그가 매일매일 그곳으로 드나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긴 하겠지. 그래서 걸음 하는 횟수를 줄인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혹시나 다니엘이 어제 빈민가가 털린 것을 알아채는 것은 아닌지 조금 긴장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니 적어도 다니엘이 어제 빈민가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내는 것은 며칠 후의 일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정신없이 오전 일정을 마쳤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에게는 최근 현대사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중이었지만, 내 마음이 듀아나 신전에 가 있는 탓에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탓에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이 부분을 다시 공부해 오라며 숙제를 내 주었다.

    점심을 빠르게 먹은 후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메이너드 자작 부인이 내 준 숙제 때문에 마차에서도 제국의 현대사가 기술되어 있는 책을 읽으며 이동하게 되었다.

    “작은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책을 읽고 있는 와중에 칼리나가 나를 추켜세웠다.

    “응? 갑자기 왜?”

    멋쩍은 기분에 어색하게 웃으며 칼리나를 바라보자 칼리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항상 열심히 하시잖아요. 제가 작은 아가씨 나이일 때는 하루 종일 놀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거든요. 그런데 작은 아가씨는 새벽부터 일어나 검술 훈련에, 교양 수업에, 오후에는 신전으로 와서 신력 수련까지 하시잖아요. 피곤하실 법도 한데 웬만해서는 빠지지도 않으시고요. 항상 그 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리고 아직 어리시지만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칼리나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를 듣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의 내가 온전히 아홉 살의 나였다면, 나도 놀고 싶겠지.

    그리고 공부도 쉬엄쉬엄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칼리나가 모르는 게 있었다.

    내가 겉은 아홉 살이어도 속은 아홉 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다니엘을 몰아내고 그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 그래서 미래의 크라이튼 대공가를 지키는 게 바로 내 목표였다.

    그걸 위해서는 더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을 따라잡으려면 예전의 내가 얻었던 성취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뤄야 하니까.

    진짜 아홉 살도 아닌데 이런 칭찬을 받아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나는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칼리나.”

    “진심이에요.”

    칼리나의 말을 들으며 나는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대화가 끝나고 난 후에야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괜히 마음이 요란해서인지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듀아나 신전에서 복귀하면 그때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신전에 도착하여 곧장 라이넬 사제를 따라 수련장으로 들어섰다.

    칼리나와 아니타는 내가 수련장에서 열심히 수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이 닫힐 때까지 나를 응원해 주었다.

    “사제님, 어제 데려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인해 보셨어요?”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모두들 미라벨 님과 비브르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회의장으로 가시죠.”

    “네.”

    수련장 뒷문으로 나와 회의장으로 향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회의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사제들이 모두 회의장에 모여 있었다.

    “여신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성녀님, 어서 오십시오.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바론 대주교가 나를 반기며 인사했다. 나 역시 바론 대주교에게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제 데려온 세 명에 대해서 확인이 끝났다고 들었어요.”

    “예,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다들 여기 모여서 성녀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다리 아프실 테니 앉아서 말씀을 나누시죠.”

    플레온 사제가 내게 제안했다. 나는 그제야 내 마음이 성급했음을 인정하고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일단 어제 데려온 세 분들 중에서 두 명은 성녀님 역시 아는 분들 같더군요. 혹시나 해서 성녀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일전에 문제가 있어서 저택에서 쫓겨난 집사들이에요.”

    플레온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

    세드릭과 윌터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이 쓸모가 없어져 다니엘에게서 버려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 그 둘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와 관련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씀을 드릴까요?”

    “자세한 이야기요?”

    생략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알려 주세요.”

    “듣자 하니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공녀님의 편지를 빼돌린 것을 이유로 저택에서 쫓겨났다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맞아요.”

    내가 짧게 대답하자 플레온 사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편지를 빼돌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바든이라는 집사에게 거액의 돈을 받기로 하고 공녀님의 편지를 빼돌린 것처럼 입을 맞췄다고 하는군요.”

    “바든이요?”

    플레온이 하는 말 중에서 익숙한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그럴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다니엘이 크라이튼 대공가에 심어 놓은 끄나풀이 바든인 모양이었다. 바든이 직접 세드릭과 윌터에게 그 일들을 지시했다고 하니 그가 다니엘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플레온 사제가 의아하여 내게 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해 주세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둘러대니 플레온 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을 받아들인 건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가족이 아파서 돈이 매우 필요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러나 정이 많으신 크라이튼 대공께서는 둘을 용서하고, 풀어 주었다고 하는군요.”

    여기까지는 아는 이야기였다. 세드릭과 윌터를 조사도 없이 바로 풀어 주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렸던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예. 그리고 데이릭이라는 아이에 대해서도 조사했습니다.”

    세드릭과 윌터의 이야기가 끝나자 바로 데이릭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데이릭은 빈민가에 사는 고아 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그를 습격하여 그 감옥에 가두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로 그랬다고 하던가요?”

    “이유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상한 문양을 가져다주고 그를 학대할 뿐이라고. 가끔은 의식을 잃었는데, 그럴 때면 한동안은 다시 치료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플레온 사제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설마 학대하는 걸로 봉인을 풀고 있었던 거예요?”

    “아마도요. 정신을 잃은 동안에 무언가가 벌어진 거겠죠. 그래서 학대와 치료를 반복한 모양입니다.”

    나는 아연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이었다.

    “그럼 14년 뒤에 악룡 크립소의 봉인이 풀렸다는 건, 그때까지 데이릭을 살려 두었다는 말이 되겠네요? 데이릭이 악룡 크립소의 힘을 담을 존재라면, 그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내가 추측한 내용을 이에 올렸다. 그러나 플레온 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는 편이 옳았다. 회의장 안에 들어와 있는 대사제들 모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학대와 치료를 받았을 데이릭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추측하고 보니 우리가 아는 미래에 데이릭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유감이네요. 그리고 우리가 구출해서 다행이고요. 그게 데이릭을 위해서든, 우리를 위해서든요.”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데이릭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데이릭은 학대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었고, 다니엘은 악룡 크립소의 봉인을 풀 존재를 잃게 되었으니 계획을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확실히 저보다 성녀님께서 비브르 님의 선택을 받은 게 더 나은 방법이었던 모양입니다.”

    플레온 사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했다.

    주름진 그의 얼굴에 안도감과 씁쓸함, 그리고 미안함 따위의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니에요. 플레온 사제님께서 제가 아는 미래에 성자로 계시며 쌓은 기억들이 도움이 된 거잖아요. 그게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잘 풀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플레온 사제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제들 역시 플레온 사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한마디씩 얹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그제야 플레온 사제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참, 그나저나 저는 그 아이를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플레온 사제를 향해 물었다. 그가 총괄해서 내게 얘기해 주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그 권한이 플레온 사제에게 있는 듯했다.

    플레온 사제는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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