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4)화 (74/174)
  • 74화

    윌터와 세드릭에게서 관심을 거둔 나는 옆에서 계속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아이를 확인했다.

    내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아이는 몸을 움찔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보아하니 윌터와 세드릭처럼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듯했으나, 노쇠하고 기력마저 달린 두 사람과 달리 아이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는 듯 아이는 정신을 차리는 것도 힘든 윌터와 세드릭 옆을 두 발로 딛고 서 있었다. 내가 계단에서 밀었는데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비브르, 저 아이가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라는 그 아이 맞아?’

    우리를 이용하여 감옥에서 벗어나려 했던 점이 영악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아이가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라고는 쉬이 믿기 힘들었다.

    아이는 평범해 보였다.

    키가 나랑 엇비슷해 보였으니 나이는 나랑 또래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는 천천히 아이의 외관을 살펴보았다.

    관리되지 않아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남색 머리칼에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금색 눈동자. 지하에서 오물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인지 꾀죄죄해 보이는 외모까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원래 눈이 금색이었던가? 조금 전에는 보라색이었던 거 같은데…….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시 보아도 아이의 눈은 금색이었다.

    아까 지하실은 어두워서 내가 잘못 본 듯했다. 신력으로 밝힌 희미한 빛에 의지해 보았으니 내가 잘못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상황도 워낙 급박했으니.

    어쨌든 아이는 씻지 못한 까닭에 좀 더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아이에게서 도저히 악한 기운을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아까 음침하게 웃을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만, 그건 그런 상황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비브르의 답이 필요했다.

    [맞아. 내가 보았다던 아이가 바로 저 아이란다.]

    비브르의 말을 들은 후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름이 뭐야?”

    “뭐? 아니,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아이가 존대로 바꿔 의문을 표했다. 그러더니 눈을 한 바퀴 돌리며 눈치를 살폈다.

    “제 이름은 왜……요?”

    “얘, 너, 야 이렇게 부를 순 없으니 이름을 알려 달라고. 싫으면 그냥 야라고 부를게.”

    내가 통보하듯 말하자 뒤늦게 아이가 입을 열었다.

    “데, 데이릭 모어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데이릭 모어라 밝혔다. 미래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을 떠올려 봐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확신만 들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데이릭이 미래에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인물이 아니거나, 아니면 정말 비브르와 했던 이야기처럼 다니엘에게 이용당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일 터였다.

    “그래, 데이릭. 너 지금 내 어깨에 있는 뱀이 보이는 거지?”

    아까 지하에 있을 때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비브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일반인이, 그것도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라 할 정도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 데이릭이 비브르를 알아보았다.

    내가 데이릭을 보고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 맞는지 의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보, 보이는데요.”

    데이릭은 망설이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그에게는 비브르의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데이릭을 주시했다. 데이릭은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목을 움츠리고 내 눈치를 살폈다.

    “다녀왔습니다.”

    때를 맞추어 베트람이 복귀했다. 나는 그제야 데이릭에게서 몇 걸음 뒤로 떨어졌다.

    “잘 다녀왔어요? 그쪽은 어떻게 됐어요?”

    “처리를 잘 마쳤습니다. 그들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뭘 어떻게 처리한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저희 일단 돌아갈까 봐요. 여기서 계속 심문하기에는 불편하기도 하고, 또 혹시 모르잖아요. 다니엘이 올지.”

    따로 연락책이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다니엘에게 즉각적으로 이곳의 상황이 전달될 리는 없겠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내가 제안하자 베트람이 라이넬 사제를 확인했다. 라이넬 사제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트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베트람이 대답을 마치며 윌터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 어디로 저희를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세드릭이 겁에 질려 우리를 향해 물어봤다. 돌아보니 윌터 역시 우리의 대화를 걱정스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제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비록 아내는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아들이 있습니다.”

    윌터는 떨리는 손을 모아 우리에게 빌 듯이 말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는 건 저번 사건으로 인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말해 봤자 우리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이곳에 있을 건가? 이곳에 있다가는 다니엘에게 걸려서 죽기 딱 좋을 텐데. 그럼 집에서 기다리는 아들도 못 보게 될 테고.”

    내가 냉정한 목소리로 윌터에게 말했다.

    윌터와 세드릭에게는 좀처럼 말을 좋게 해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엄마의 편지를 빼돌렸노라 거짓 쇼를 벌였기 때문에 그들을 좋게 보려야 좋게 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일어나.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테니까.”

    내가 말을 마치자 베트람과 라이넬 사제가 두 사람을 부축했다. 상대적으로 어리고 체구가 작은 내가 그들을 부축할 수 없기에 아까와 마찬가지로 베트람이 윌터를, 그리고 라이넬 사제가 세드릭을 부축하여 빈민가를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맡게 된 데이릭을 돌아보았다.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네에.”

    데이릭은 시무룩한 얼굴로 나에게 대답했다. 혹시나 일이 생길까 염려되어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목을 묶은 손과 내 손목을 꼭 묶어 놓았다.

    도망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준비가 마무리된 이후 곧장 빈민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점심 조금 지나서 듀아나 신전을 출발했는데, 하늘에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걸음을 재촉해서 속도를 높였다. 저택으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 되기 전에 듀아나 신전으로 도착해야 했다.

    이런 내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라이넬 사제와 베트람 역시 최대한 속도를 내 주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윌터와 세드릭으로 인해 속도가 빠르게 나지는 않았다.

    듀아나 신전의 뒷문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뒷문에는 플레온 사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혹시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플레온 사제는 황급히 우리에게로 다가와 우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는 오히려…….”

    말끝을 흐리며 베트람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플레온 사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베트람을 향했다.

    나나 라이넬 사제는 멀쩡했지만, 싸움을 벌인 베트람의 옷은 찢기고 이리저리 튄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그렇군요. 다치신 곳이 없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플레온 사제는 나에게 웃어 보인 후 뒤늦게 베트람을 확인했다.

    “자네가 고생을 많이 한 것 같군.”

    “아닙니다.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와서 쉬게.”

    플레온 사제의 말이 끝날 무렵, 신전의 다른 사제들이 와서 윌터와 세드릭을 부축했다. 그리고 데이릭을 데리고 있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조심해요. 이 아이가 그 아이예요. 그리고 이 아이, 비브르를 볼 줄 알아요.”

    나는 손목에 묶은 손수건을 풀어 내면 다른 사제들에게 경고했다. 안이하게 있다가 혹여나 그들이 다칠 것을 우려한 일이었다.

    “비브르 님을 볼 수 있는 말씀입니까? 이 아이가?”

    내 말에 놀란 것은 플레온 사제였다.

    “네.”

    내가 긍정하자 플레온 사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들, 들었지?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걸세.”

    플레온 사제가 다른 사제들에게 지시했다. 옆을 지키고 있던 사제들은 내게 인사를 해 보인 후 데이릭을 데려갔다.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일단 옷 다 갈아입고 나면 저는 집으로 돌아가 볼게요. 내일 다시 올 테니까 혹시 아는 거 생기면 내일 말씀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플레온 사제와 라이넬 사제, 그리고 베트람을 향해 인사한 후 곧장 빠른 걸음으로 탈의실을 향했다.

    재빠르게 들어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손목에 차고 있던 마법 아티팩트를 벗었다. 그러자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익숙하게 바뀌었다.

    봐도 봐도 신기해서 나는 한참이나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뒤늦게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복도를 따라 수련장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속도를 늦추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런 후에 수련장 문을 열었다.

    “나오셨어요, 작은 아가씨?”

    “나오셨어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리나와 아니타가 나를 반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이제 돌아가자.”

    “네, 작은 아가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