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사랑받는 손녀님 (72)화 (72/174)
  • 72화

    우리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신력을 사용해 주변을 밝혔다고는 해도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베트람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비브르의 뼈로 만들어진 검, 레피드를 언제라도 부를 수 있도록 대기해 두었다.

    우리는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 깊은 곳으로 가면 갈수록 신음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역한 악취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우리는 내부를 막은 창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넬 사제는 창살 너머로 신력을 보내었다. 그러자 창살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잔인한……!”

    라이넬 사제가 반사적으로 분노를 입에 담으며 내 눈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나는 감옥 내부를 확인한 후였다.

    “괜찮아요. 안 가리셔도 돼요.”

    지금 외형이 아홉 살이라고 해서 속까지 아홉 살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용병으로 일하며 이런 현장은 몇 번이나 마주친 나였다.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라이넬 사제가 망설이다가 손을 치웠다.

    나는 그의 친절에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여 준 후 곧장 감옥 안을 살폈다. 안을 살피는 내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감옥 안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검질기게 말라붙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부를 살폈다.

    감옥 안에는 비브르가 말했던 대로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셋 모두 오물을 뒤집어쓴 모습이었으나 형태를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우선 두 명은 비브르의 말대로 최근 크라이튼 대공가에서 쫓겨난 집사 세드릭과 윌터였다. 그들은 빈사 상태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한쪽 팔이 수갑과 연결되어 있는 탓에 누워 있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옆에 있는 작은 체구의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철컹.

    내가 안을 확인하는 사이, 베트람이 감옥을 열었다. 어떻게 열었나 싶어서 그를 확인해 보니 그의 손에 열쇠가 들려 있었다.

    “열쇠는 어디서 난 거예요?”

    “계단 옆에 걸려 있었습니다.”

    “…….”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열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체 왜?

    왜 이렇게 쉽지?

    불안함이 싹트는 와중이었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아이를 좀 봐 주세요. 전 이 둘을 확인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 될 아이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것보다 내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세드릭, 그리고 윌터.”

    내가 이름을 부르자 두 사람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했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니 그들이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반면, 두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누, 누구…….”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그들이 아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기력이 많이 소모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이넬 사제를 돌아보았다.

    “치료를 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그래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조심스럽군요. 일단 장소를 옮겨서 치료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까지 이 두 사람이 버틸 수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야죠. 어쨌든 지금 이곳에서는 치료해선 안 됩니다.”

    “알겠어요. 근데 그럼 어떻게 이들을 데리고 나가죠?”

    지하를 찾은 우리도 셋, 그리고 감옥에 있는 이들도 셋이었다.

    베트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셋을 옮길 테니 안전한 곳으로 가 계십시오.”

    “셋을 어떻게 옮기려고 그래요?”

    “세 번 왕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 같은데요. 차라리 각자 한 사람씩 맡아서 올라가는 건 어때요? 체구도 저보다 작아서, 저 아이 정도면 저도 부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성…….”

    무심코 나를 부르려던 베트람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내 의견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완강한 말투였다. 하지만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너무 시간을 오래 끌면 윌터와 세드릭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괜찮으니까 제 말대로 해 주세요.”

    “…….”

    “그 말씀대로 하게.”

    다행히도 라이넬 사제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베트람이 열쇠로 세 사람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흐으.”

    아이가 수갑에서 풀려나 넘어지기 전에 내가 안아서 부축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고통 때문인지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

    “그럼 저는 먼저 나가 볼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앞장설 테니 안전이 확보되면 따라오십시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윌터를 둘러업은 베트람이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생각해 주는 베트람의 마음이 내심 고마웠다.

    우리는 들어왔던 순서 그대로 다시금 계단을 통해 바깥으로 움직였다.

    내가 부축하는 아이는 금세 끊어질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브르, 네가 왔을 때도 이 상태였어?’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할근거리는 호흡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절로 조바심이 났다.

    [저 두 인간의 상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만, 미라벨 네가 부축하고 있는 그 아이는 내가 왔을 때보다 더 크게 부상을 입은 듯하구나.]

    ‘그럼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고작 며칠 사이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다니엘이 알아챈 건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며 비브르에게 물었다. 적어도 오늘 오전까지 다니엘과 같이 있었던 비브르라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런 낌새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있었다면 내가 미라벨 네게 말을 했겠지.]

    비브르의 말이 맞았다. 만일 무언가 변수가 생겼거나 지켜보던 도중 수상한 행동이 보였다면 비브르가 나에게 말을 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원점이었다.

    영 찜찜한 느낌이 가슴 깊숙한 곳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흐, 흑.”

    “괜찮아?”

    이제는 호흡을 끊으며 흐느끼는 아이의 상태를 보다 못해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멈추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부상으로 인해 흐느낀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까닭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내 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피었다.

    “다들 멈…….”

    나는 황급히 부축하고 있던 아이를 밀치며 외쳤다. 아니, 외치려 했다.

    그러나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베트람이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를 올려다보니 그의 목에 작은 칼날이 겨눠져 있었다.

    “이게 무슨!”

    라이넬 사제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나직이 외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주인님께 감옥이 털릴 뻔했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우리 목숨이 날아갔을 텐데 말이야.”

    베트람의 목에 칼을 겨눈 남자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를 따라 여섯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좁은 지하실에서 우리를 포위하듯 섰다. 일단은 뒤로 천천히 물러서며 그들을 경계했다.

    “내가 말한 대로잖아.”

    우리가 포위되는 사이, 남자의 말을 받아친 것은 내가 밀치는 바람에 바닥을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던 아이였다.

    아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소매로 코피를 닦아 내었다.

    “며칠 전에 당신들이 주인님이라 부르는 그 쓰레기가 다녀간 날, 하얀 뱀 같은 게 돌아다녔다고.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아이의 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 정도 이상의 신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비브르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해야 했다.

    하지만 저 아이는 비브르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저 아이가 악룡 크립소의 씨앗이기 때문에?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나는 언제라도 레피드를 쥘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그사이에도 아이는 지하로 들어온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자, 이제 약속 지켜. 내가 도움을 주면, 날 풀어 주기로 했잖아.”

    아이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단검을 든 남자에게 말했다.

    “풀어줘?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우리가 널 왜 풀어 줘야 하지? 지난번에도 말했을 텐데. 주인님께서 원하는 건 저 떨거지 둘이 아니라 너라고.”

    “뭐?”

    단검을 든 남자가 한쪽 입술을 틀어 비릿하게 웃었다.

    “약속과 다르잖아!”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뭐, 어쨌든 침입자가 있을 거라고 알려 준 건 고맙다. 네 계획 덕에 손쉽게 침입자들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 점에 감사의 말 정도는 남기도록 하지. 고마워”

    남자는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는 충격받은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아이와 남자의 대화를 확인하는 사이 베트람이 업고 있던 윌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 후에 막대기로 위장한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사실 대충 보아도 그렇게 강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겠어요.”

    “위험할 수 있으니 뒤에 붙어 계십시오.”

    베트람이 적들과의 간격을 확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라이넬 사제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고작 막대기 하나로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참나. 네가 뭐,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브라이언 크라이튼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단검을 던졌다 잡으며 꺼내는 남자의 말에 우리를 에워싼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저자의 말이 웃겨서 웃는 건지, 아니면 우리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서 웃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글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겠지.”

    “핫!”

    베트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를 에워싼 이들이 베트람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0